오늘의 시 992

오늘의 시 - 구름에 깃들여

구름에 깃들여 천양희 누가 내 발에 구름을 달아놓았다 그 위를 두 발이 떠다닌다 발, 어딘가,구름에 걸려 넘어진다 생(生)이 뜬구름같이 피어오른다 붕붕거린다 이건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나는 놀라서 머뭇거린다 하늘에서 하는 일을 나는 많이 놓쳤다 놓치다니! 이젠 구름 잡는 일이 시들해졌다 이 구름,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구름기둥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맹세이니 구름은 얼마나 많은 비를 버려서 가벼운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무거운가 구름에 깃들여 허공 한채 업고 다닌 것이 한 세기가 되었다

오늘의 시 2023.11.06

오늘의 시 - 나는 벌써

나는 벌써 이재무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 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 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 버렸다

오늘의 시 2023.10.30

오늘의 시 -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오는 소리 박이도 가을은 오는가 무력했던 여름 비극의 환상이 언뜻언뜻 무더위로 사라진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어둠의 꺼풀을 벗고 먼동이 꿈틀대는 모습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순리를 보러 가자 흥건히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이 육신을 세우고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을을 나서는 기침소리 가까이 흐르는 냇물소리 살아 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차가운 소리 가을이 온다, 내 정신으로 살아온다

오늘의 시 2023.10.23

오늘의 시 - 가을밤

가을밤 나해철 살아서 열린 귀로 가을밤을 들을 수 있어 기뻤습니다 먹고 사는 일보담 벌레 우는 소리가 더 가까워 고요히 엎드려 울 때 둥두렷이 달이 떠올랐습니다 몸을 구부린 채 저 산들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시간들은 별이 되어 하늘에 내걸리고 맑아진 영혼의 한 조각을 데리고 내 울음이 낙타가 되어 서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깨끗한 추억 속의 한 남자가 먼 달빛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시 2023.10.16

오늘의 시 - 따뜻한 감나무

따뜻한 감나무 곽재구 네가 소년이었을 때 푸른 내 가지 위에 올라 바람 그네 타는 걸 좋아했지 순한 귀 기울여 파랑새 소리 들을 때면 잎사귀 흔들며 나도 가슴이 뛰었지 세월이 흘러도 바람 그대로 불고 눈도 비도 햇살도 대지를 적시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나무 위에 올라 새소리도 듣고 바람 그네도 타는데 사람아 울지 마렴 옛날처럼 내 무릎 위에 오르렴 오르다 엉덩방아도 찧고 흰 수염 날리며 바람 그네도 타고 밤이 깊어지면 꿈꾸는 잎사귀들 속에서 푸르디푸른 밤하늘의 별들을 보렴 새로 태어난 소년 소녀들이 내 둥지를 타고 오를 때 산 너머 흰 구름 새로 돋은 무지개를 보여 주렴

오늘의 시 2023.10.09

오늘의 시 -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을 줄까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을 줄까 이종욱 과수원의 과일은 남몰래 익어가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낙과를 줄까 온전하게 익어가는 빨간 사과를 줄까 후끈한 바람이 불어오고 지나가고 끓는 햇살이 펴졌다 거두어지고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을 줄까 바람도 부서지는 것 햇살도 거둬지는 것 하늘은 높았다가는 낮아지고 잠겨드는 노을 속의 타는 속마음 펄럭였다 부서졌다 하나 되는 바람 짐짓 낙과에게로 부는 바람을 줄까 사랑하는 이에게 보일 수 없는 사랑의 바람 또 햇살 보이지 않는 바람 위에 보이지 않는 햇살 아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을 줄까 빨간 사과 위에 내리는 햇살을 줄까 내가 바람 되어 찢기며 불려갈까 내가 햇살되어 펄럭이며 내려앉을까 내가 하늘 되어 아아 천둥치는 하늘 되어

오늘의 시 2023.09.18

오늘의 시 - 거룩한 일상

거룩한 일상 최은숙 젖은 빨래를 반듯이 펴서 차곡차곡 포갰다 널면 다림질 안 해도 새 옷처럼 반듯하지 양말도 대충 걸지 말고 짝 맞춰 나란히 사소한 일을 정성껏 흙 씻어 낸 호미를 헛간 벽에 걸 때 할머니는 호미 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으시지 휙휙 집어 던지지 않으시지 개켜 놓은 이불 위에 베개를 올릴 때도 수저를 식탁에 놓을 때도 설거지한 그릇을 포갤 때도 호미와 벽은 평화롭고 가만히 이불 위에 내려앉는 베개는 포근하고 나란히 걸린 양말은 사뿐사뿐 하늘을 걷지 수저도 그릇도 주인처럼 정갈하고 고요하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런 어느 날 우린 햇볕을 품고 바람에 나부끼는 시간을 알게 되겠지 젖은 마음일 때도 천천히 주름을 펴는 법을 알게 되겠지 나를 함부로 동댕이치지 않고 살게 되겠지

오늘의 시 2023.09.11

오늘의 시 - 매미의 울음 끝에

매미의 울음 끝에 박재삼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의 소리인 듯 쟁쟁쟁 천지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이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오늘의 시 2023.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