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냥 성 냥 오세영 어둠 속에서 칼을 가는가. 한밤에 깨어 성냥을 켜본 자는 안다. 곽 속에 갇혀 싸늘하게 쏘아보는 눈빛. 배신은 차가운 불이다. 이글이글 타는 숯불이 아니라 파랗게 빛나는 인광, 누구나 끼리끼리 체온을 부비며 견디는 겨울, 마른 성냥개비는 결코 정에 젖지 않는데 언 몸을 녹이려- 팍, .. 오늘의 시 2006.02.19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 오늘의 시 2006.02.13
주꾸미 주꾸미 한승원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주꾸미들이다 소라껍질에 끈 달아 제 놈 잡으려고 바다 밑에 놓아두면 자기들 알 낳으면서 살라고 그런 줄 알고 태평스럽게 들어가 있다 어부가 껍질을 들어올려도 도망치지 않는다 파도가 말했다 주꾸미보다 더 민망스런 족속들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오늘의 시 2006.02.05
절대 고독 절대 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오늘의 시 2006.01.23
서리꽃 서리꽃 정일근 차가워진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으로 뜨거워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약속 빙점 아래 잠들어 꽃눈 속의 봄꽃들 아직 눈뜨지 못 하는데 겨울의 새벽 입술이 유리창에 닿는 얼음의 길을 따라 서리꽃 핀다 서리꽃은 빙점하에 피는 뜨거운 꽃 허공에 뿌리내린 불가해의 꽃 차가운 하늘에서 .. 오늘의 시 2006.01.21
세한도 가는 길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시란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 오늘의 시 2006.01.08
나무 1 나무 1 오세영 새해 첫날 막 잠에서 깨어나면 창 밖 나무들의 함빡 물 오르는 소리. 처녀가 이미 소녀가 아니듯 오늘의 나무는 이미 어제의 나무가 아니다. 새 날이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아라. 어제의 나무가 오늘의 나무가 아니듯 거기 너를 바라보는 또다른 너. 오늘의 시 2006.01.02
하 루 하 루 고은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것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저녁 어둑발 자옥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오늘의 시 2005.12.25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 오늘의 시 2005.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