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1022

오늘의 시 - 파타고니아의 양

파타고니아의 양 마종기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살아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올려다볼 별 하나 없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

오늘의 시 2025.05.19

오늘의 시 - 황사바람이 쓸 만하다

황사 바람이 쓸 만하다 - 내가 걷는 백두대간 109 이성부 철없는 봄눈 쌓여 산책길을 지워 버렸다대낮인데도 해는 흐지부지 떠서어디 아편 맞은 하늘처럼 온통 게슴츠레하다황사 데불고 온 성난 바람이나를 눈물콧물 흐르게 하고산골짜기 모두 가려 먼 데를 볼 수 없다동서남북 어디인지 가늠을 못하는데내 안에 잠자던 도발끼가 파르르 눈을 뜬다불확실성이야말로 나를 틔우는 첫번째 힘이다몇 해 전이던가이 등성이에서 꼭 이 무렵에야간행군하던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다전쟁이 사라진 뒤 오십 년이 지났어도적 없는 전쟁은 여기까지 올라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억울하고 안타까운 일 산 위에서도 적지 ..

오늘의 시 2025.05.12

오늘의 시 - 고사리 꺾기

고사리 꺾기                          - 제주도 기행 5                                   나호열 맛은 없지만밥상에 오르지 않으면 왠지 서운한고사리 꺾으러 간다새벽 해 뜨기 전이라야찔레 덩굴 속이나 풀섶에 숨어 있는고놈이 보인다는데내 눈엔 그 풀이 그 풀 같다대궁을 잘라도 여덟 번 아홉 번순을 올린다는 오기가나에게는없다뽑히기를 평생 바랐으나수많은 군중 속에 하나에 불과한 것이행인가 불행인가문득 이 세상 모든 나무의 시조가바다에서 올라온 고사리라는 진화론의 한 구절이전생을 스치고 지나는 순간꼿꼿한 고사리들이 불쑥 돋아 올랐다소도 말도 먹지 않는다는 고사리나도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오늘의 시 2025.04.28

오늘의 시- 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곽재구 어릴 적엔강 건너 산비탈 마을기차가 지나갈 때손 흔들었지창밖으로 모자를 흔들던 이가바람에 모자를 놓쳤을 때보기 좋았지 어른이 되어 기차를 타면창밖으로 모자를 흔들고 싶었지강 건너 앵두꽃 핀 마을아이들이 손을 흔들면창밖으로 하얀 모자를 흔들다명주바람에 놓아주고 싶었지 모자를 열개쯤 준비해강마을의 아이가 손을 흔들 때하나씩 바람에 날리는 거야 KTX는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달리지손을 흔드는 아이도 없지 기차는 좀 느리게 달려야 해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 해사람이 기차고기차가 사람이야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거 부끄러워 시속 삼십 킬로미터면 강마을아이들과 손 흔들 수 있어시속 이십 킬로미터 구간에..

오늘의 시 2025.04.21

오늘의 시 - 참 좋은 말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한 잎의 혀로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한줄기의 슬픔으로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한 송이의 말로참, 좋은 말을 꽃 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오늘의 시 2025.04.14

오늘의 시 - 지상의 봄

지상의 봄                               강인한 별이 아름다운 건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다시 집을 짓는이 지상에서 보도블록 깨진 틈새로어린  쑥이 돋아나고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 낸 집터에밤이 내리면집 없이 떠도는 자의 술픔이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거대한 굴삭기 한 대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 2025.03.31

오늘의 시 - 티끌이 티끌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                                    김선우 내가 티끌 한점인 걸 알게 되면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오늘의 시 202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