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992

오늘의 시 - 20년 후, 지(芝)에게

20년 후, 지(芝)에게 최승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

오늘의 시 2024.03.11

오늘의 시 - 하루로 가는 길

하루로 가는 길 최승호 하루로 가는 길은 하루를 지나야 하는 법 어제에서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스물 네 시간을 살아야 했다 1분만 안 살아도 끝장나는 인생 하루로 가는 길은 낮과 밤을 지나야 하는 법 어제에서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소음을 거쳐야 했다 메마른 밤, 오늘의 갈증이 내일 해소된다고 믿으면서 참아낸 하루, 하지만 물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는 낙타처럼 오늘의 짐을 또 내일 짊어져야 한다 발걸음은 계속된다. 하루로 가는 길에서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법 하루에 완성되는 인생도 없지만 아무튼 죽음이 모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수평 위로 뜨는 해를 보며 오늘은 숨크게 밝은 하루를 누려야 한다

오늘의 시 2024.03.04

오늘의 시 - 겨울 하루, 매화를 생각함

겨울 하루, 매화를 생각함 조용미 이월, 매화에 기운이 오르면 그 봉오리 따다 뜨거운 찻물 부어 한 송이 우주를 찻잔 속에 피어나게 해 볼까 화리목 탁자 근처 매화향을 두르고 잠시 근심을 놓아 볼까 九九의 첫날인 십이월의 어느 날부터 나는 목이 길어지고, 옷을 두꺼워지고 발은 더욱 차가워질테지만 九九消寒圖의 매화에 하루하루 표시를 해 나가며 여든 하루 동안 봄이 오는 저 먼 길을 마중 나가는 은밀한 기쁨을 누려보는 것이다 매화가 피는 삼월의 어느 봄날이 올 때까지 여든 하루는 한 생, 여든 하루는 단 한순간 매화가 피는 한 생이란 매화를 보지 못하고 기다리는 한 생 탐매행에 나선 이른 봄날 어느 하루는 평생을 다 바치는 하루 두근거리나 품을 수 없는 하루

오늘의 시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