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992

오늘의 시 -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서정홍 들꽃도 함께 피어야 아름답고 새들도 함께 날아야 멀리 날 수 있지 사람도 함께 해야 모든 일이 잘 풀려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떤 일을 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여럿이 둥글게 앉아 보는 거야 둥글게 앉아 서로 생각을 나누다 보면 큰 고민거리도 작아질 테니까 세상 보는 눈이 깊어질 테니까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누구나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의 시 2023.04.02

오늘의 시 - 누룩

누룩 이성부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 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오늘의 시 2023.03.26

오늘의 시 - 경칩

경칩 최은숙 논물 고인 곳에 개구리들이 알을 낳았다 논두렁 옆 수로에도 올록볼록 개구리 알이 떠 있다 올챙이가 생기려는지 꿈틀거린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고 '우수'다 한자로는 雨水라고 쓴다 봄비가 와서논물이 고이는 날이라고 아빠가 가르쳐 주셨다 정말 비 오게 생긴 글자라고 했더니 엄마는 올겨울엔 눈도 두 번밖에, 그것도 시늉만 했다고 도대체 하늘에서 내려오는게 없다고 하신다 이런 걸 동문서답이라고 하는거다 똑똑해라 정말 그렇게,라고 해야지 비가 안 와서 동네 어른들이 풍물을 놀았다 제를 올리고 떡이랑 나물이랑 과일을 논에 뿌렸다 냄새 맡고 멧돼지가 내려오면 어쩌지? 뒤뜰에 있는 누렁이가 걱정이다 우수 다음엔 경칩이라고 한문 선생님이 알려 주셨다 놀랄 경(驚), 숨을 칩(蟄) 벌써 봄이야? 겨울잠 자는 동..

오늘의 시 2023.03.12

오늘의 시-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서정홍 종교가 없어요, 저는 그러니까 수십 억짜리 시멘트 건물 안에서 냉방기 난방기 팍팍 틀어놓고 기도 같은 거 안 해요 생각만 해도 그 꼴이 참 우습잖아요 지구 온난화로 생태계가 참 엉망인데요 그런데 치사하게 네 편 내 편 가르지도 않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는 아무데도 물들지 않은 청정구역 안에서 산다니까요

오늘의 시 2023.03.05

오늘의 시 - 저무는 황혼

저무는 황혼 서정주 새우마냥 허리 오구리고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넘어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역귀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봇도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슥히 비기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오늘의 시 2023.02.26

오늘의 시 - 겨울숲에서

겨울숲에서 이재무 겨울나무들의 까칠한 맨살을 통해 보았다, 침묵의 두 얼굴을 침묵은 참 많은 수다와 잡담을 품고서 견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겨울숲은 가늠할 수 없는 긴장으로 충만하다 산 이곳저곳 웅크린 두꺼운 침묵, 봄이 되면 나무들 가지 밖으로 저 침묵의 잎들 우르르 몰려 나올 것이다 봄비를 맞은 그 잎들 뻥긋뻥긋, 입을 떼기 시작하리라 나는 보았다 너무 많은 말들 품고 있느라 수척해진 겨울숲의 침묵을

오늘의 시 2023.02.12

오늘의 시- 시래기

시래기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오늘의 시 202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