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992

오늘의 시 - 나무 경전

나무 경전 김일태 나무가 수행자처럼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제 스스로가 수많은 길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날지 않아도 하늘의 일을 아는 것은 제 안에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입을 다물고 있다고 침묵한다 말하지 마라 묵언으로 통하는 나무의 소리가 있다 나무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지 마라 제 몸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나무의 문자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나무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라 가지지 않았기에 나무는 경계 없이 우거져 산다

오늘의 시 2022.09.11

오늘의 시 - 풀꽃

풀꽃 이성선 맑은 마음을 풀꽃에 기대면 향기가 트여 올 것 같아 외로운 생각을 그대에게 기대면 이슬이 엉킬 것 같아 마주 앉아 그냥 바라만 본다 눈 맑은 사람아 마음 맑은 사람아 여기 풀꽃밭에 앉아 한나절이라도 아무 말 말고 풀꽃을 들여다보자. 우리 사랑스런 땅의 숨소릴 듣고 애인같이 작고 부드러운 저 풀꽃의 얼굴 표정 고운 눈시울을 들여다보자. 우리 가슴을 저 영혼의 눈썹에 밟히어 보자. 기뻐서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이네. 풀꽃아 너의 곁에 오랜 맨발로 살련다. 너의 맑은 얼굴에 볼 비비며 바람에 흔들리며 이들을 지키련다.

오늘의 시 2022.09.11

오늘의 시 - 개망초꽃

개망초꽃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오늘의 시 2022.08.28

오늘의 시 - 풀섬 아이

풀섬 아이 김진수 지북산 몰랑에 뻐꾸기 울면 산비둘기 구구대는 장사슴목골 달랑 한마지기 옹사리밭에 아부지는 들컹들컹 쟁기질하고 어무니는 쪼락쪼락 풋콩을 딴다 가다가 한 모금 또 가다가 한 모금 촐랑촐랑 줄어가는 막걸리 심부름 한 쪽박 샘물로 덧채우던 아이가 아지랑 묏등 앞에 바알갛게 엎드렸네 한 사발 거뜬 비우신 아부지 "오늘 막걸리는 왜 이리 싱겁다냐?" 그 소웃음소리 지금도 들리네

오늘의 시 2022.08.21

오늘의 시 - 흰 부추꽃으로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런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오늘의 시 2022.08.07

오늘의 시 - 숲길

숲길 곽재구 숲은 나와 함께 걸어갔다 비가 내리고 우산이 없는 내게 숲은 비옷이 되어 주었다 아주 천천히 나의 전생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숲의 나무들은 자신들의 먼 여행에 대해 순례자에게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세상의 길 어딘가에서 만년필을 잃은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울지 말라며 아이보다 많은 눈물을 흘려 주었다 목적지를 찾지도 못한 내가 눈보라 속에 돌아올 때도 숲은 나와 함께 걸어왔다

오늘의 시 202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