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992

오늘의 시 -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시 2022.02.13

오늘의 시 - 얼음 방정식

얼음 방정식 서정임 떠나기 전 붙잡았으면 좋았을걸, 머리가 떨어져나간 몸통만 남은 눈사람을 붙잡고 있는 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물과 물이라는 한 유전자를 가진 자들은 더는 가까워질 수 없어 때로 멀어지기도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허상만 남아 있는 눈사람을 놓지 못하는 강의 낯빛이 하얘진다 쉽게 풀리지 않는 마음을 풀어야 할 저 극과 극의 방정식 강가에는 한 몸에서 자라 제각기 뻗어나간 가지들을 껴안고 있는 벚나무가 한 잎 입 없는 입으로 바라보며 서 있고 저 멀리 마주 오던 말티즈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짖는다

오늘의 시 2022.02.06

오늘의 시 - 겨울 산에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 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오늘의 시 2022.01.30

오늘의 시 - 눈사람

눈사람 강영환 대설주의보가 지나간 벌판에 서서 햇살만으로도 녹아내릴 사람이다 나는 한쪽 눈웃음으로도 무너져 내릴 뼈 없는 인형이다 벌판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곁에 왔다 걸어온 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갈 길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내 지키고 선 이 자리에서 여분으로 남겨진 사랑도 가슴에서 뽑아낸 뒤 흔적 없이 떠나고 싶을 뿐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려 붙인 눈썹이 떨어져 나간 뒤 그대 뿜어낸 입김에 빈터로 남을 뿐 젖지 않고 떠난 자리에 남겨진 나뭇가지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다 다물었는지 끝내 숯이 된 눈으로 남는다 나는 그대 온기 담은 눈빛에도 녹아내릴 가까운 햇살이 두려운 사람이다

오늘의 시 2022.01.23

오늘의 시 - 고드름

고드름 남연우 호수를 건너는 다리 난간에 위험한 시도가 매달렸다 뛰어내릴까 말까 밤새 고민한 흔적을 말해주듯 신발을 벗어 놓은 발부리 끝이 뾰족하다 방울 방울지는 투명한 펜촉으로 써내려간 유서를 자필서명, 햇살이 받아 적는다 쨍한 서릿발 눈빛 송곳을 후빈 아픔 용서해달라 뛰어내린 그 자리에 마르지 않은 눈물이 떨어진다 혼탁한 생의 한복판 급소를 찌른 얼음칼, 고름이 튀었다

오늘의 시 2022.01.16

오늘의 시 - 알혼 섬에서 쓴 엽서

알혼 섬에서 쓴 엽서 박소원 잊겠다는 결심은 또 거짓 맹세가 되었다 시베리아 기차 좁은 통로에 슬그머니 꺼내놓고 온 이름에게 알흔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엽서를 쓴다 푸른색이 선명한 엽서의 뒷면에 가까운 곳이라고 쓰고 그 아래 아득한 곳이라고 쓴다 그러나 막상,할말이 뚝 끊겨서 오믈이라는 생선을 끼니마다 먹는다고 쓰고 꽁치와 고등어의 중간種인 것 같다고 오믈이야기만 쓴다 엽서보다 내가 더 먼저 도착할 지 모른다고 쓴 후 나는 지금 로비에서 서성이다 수영장 의자에 앉아 있다고 별 의미없는 動線까지도 적는다 풀밭에 앉아 네잎크로버를 찾는 사람 푸른 호수로 내려가는 사람 전망대쪽으로 올라가는 사람 길의 방향은 각각 다르지만 영혼의 處所도 각각 다르지만 해가지지 않는 저녁 일행들은 약속처럼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

오늘의 시 2022.01.09

오늘의 시 - 하루로 가는 길

하루로 가는 길 최승호 하루로 가는 길은 하루를 지나야 하는 법 어제에서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스물 네 시간을 살아야 했다 1분만 안 살아도 끝장나는 인생 하루로 가는 길은 낮과 밤을 지나야 하는 법 어제에서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소음을 거쳐야 했다 메마른 밤, 오늘의 갈증이 내일 해소된다고 믿으면서 참아낸 하루, 하지만 물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는 낙타처럼 오늘의 짐을 또 내일 짊어져야 한다 발걸음은 계속된다. 하루로 가는 길에서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법 하루에 완성되는 인생도 없지만 아무튼 죽음이 모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수평 위로 뜨는 해를 보며 오늘은 숨크게 밝은 하루를 누려야 한다

오늘의 시 2022.01.02

오늘의 시 - 사라진 서점

사라진 서점 고형렬 드르륵, 조용히 문을 열고 흰눈을 털고 들어서면 따뜻한, 서점이었다 신년 카드 옆엔 작은 난로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높은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아 추워, 언 손을 비비면 그 12월임을 알았다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리워 좋은 책 한 권 고르다 보면 어디선가 하늘 같은 곳에서 새로운 날이 오는 것 같아, 모든 산야가 겨울잠을 자는 외로운 산골의 한낮 마음만한 서점 한쪽엔 생의 비밀들을 숨긴 책들이 슬픈 책들이, 있었다 다시 드르륵, 문을 열고 단장된 책들이 잘 꽂혀 있는 그 자리에 한참, 서고 싶다 그대에게 소식을 전하고 새로운 마음을 얻으려고 새 눈 오던 12월 그날처럼

오늘의 시 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