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40분, 지쳐서 더 이상 못 걸을 것 같았는데 늦은 점심을 먹고 쉬었더니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음식점에서 나와 해파랑길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길을 확인한다.
그리고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걷자고 했다.
강구항 구경을 한다고 해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여기에서 묵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닌가.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걷는다.
오포해수욕장을 지나 걷다 보니 채반에 가지런히 놓인 가자미가 보인다.
나란히 서서 겨울 햇볕을 받고 있는 가자미가 있는 풍경이라...
무슨 설치미술 작품 같아 보인다.
오징어든 명태든 가자미든 말리기 위해 널어 놓은 모습을 보면 바로 그렇게 해 놓은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정성이 말린 가자미에 그대로 전해지겠지.
바다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이정표가 오르막을 손짓한다.
점심 먹은 것도 아직 소화가 안 되었는데 오르막길을 오르라니 너무 하는 것 아니야?
그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지도를 보신 고문님께서 아무래도 올라가야 할 것 같다고 하시네.
힘을 내어 스틱을 팍팍 짚고 앞서 걷는다.
잠시라도 멈추면 언덕길에 세워 놓은 자동차가 밀리듯 저절로 뒤로 밀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면서 이렇게 올라야 하는 三思海上公園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진다.
등에 땀이 나도록 오르자 영덕어촌민속전시관이 보인다.
영덕 대게를 잡는 법부터 영덕 대게의 성장과정 등 영덕 대게에 대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전시관이란다.
정말 영덕에서는 영덕 대게 아니면 이야깃거리가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전시관은 이번에도 그냥 통과한다.
공원에는 다양한 공연장과 분수대, 폭포가 만들어져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경북 대종이다.
경북 대종은 경상북도 開道 100주년을 맞아 1996년 만들어졌단다.
종각 아래로 경상북도의 각 지역이 하나하나 씌어진 안내판이 계단을 따라 이어져 있다.
경상도의 명칭이 고려 충숙왕 때에 정해져서 700년 되었다고 하니 오래 되기는 했네.
三思海上公園의 '三思'라는 명칭에는 두 가지 설이 전래되어 온단다.
하나는 통일신라시대 이 지역에 시랑 벼슬을 한 사람이 셋이어서 三侍郞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세번 생각한다고 해서 三思인데 '들어오면서, 살면서, 떠나면서 생각한다'고 한다.
재미있는 전설이다.
우리는 삼사해상공원 뒷문으로 들어와 정문으로 나가는 길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다시 바닷가 길로 이어진다.
길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마을로 들어섰다가를 반복한다.
남호해수욕장 근처에서 휴대전화 배터리를 교환하려고 보니 친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어디쯤 걷고 있나 묻는다.
강구항에서 점심을 먹고 내처 걷는다고 하니 무리를 하는 것 같다고 말린다.
주변에 있는 펜션에서 그냥 쉬라고.
자신도 걸어 보았으니 더 걸으면 몸에 과부하가 걸린다는 생각을 하는게지.
친구가 걸을 때는 지금 우리가 걷는 블루로드 D코스는 정비가 되지 않았단다.
그래서 강구항까지만 걷고 마무리를 했다고.
블루로드 D코스는 '쪽빛 파도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런데 사실 쪽빛 바다는 해파랑길을 따라 내려오는 내내 함께 한 것 아닌가.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코스인 것이다.
가다 보니 바다쪽으로 쭉 내민 공간에 사람들이 줄줄이 붙어 있다.
여기도 바다 낚시를 즐기라고 만들어 놓은 곳인 모양이다.
정말 '다닥다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 고기를 낚는 모습이 내게는 더 재미있다.
평일 낮에 저렇게 낚시를 하고 있으니 저 사람들도 '개인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겠군.
20년 전 뉴질랜드에 여행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이다.
한국 사람들이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단다.
뉴질랜드는 환경보호 차원에서 제조업을 장려하지 않으니 기술도 그다지 필요가 없고
인구가 적으니 장사가 그리 잘 되지도 않고...
결국 이민온 한국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 낚싯대를 들고 다니는데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개인 수산업에 종사한다고 대답을 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이다.
이제 해가 작별을 고하며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나도 그만 하루 일과를 정리하면 좋으련만 오늘 걸은 거리가 25km를 넘어가자 다리가 신음을 한다.
발도 곳곳이 불편하다고 아우성이다.
종일 배낭에 시달린 어깨도 쿡쿡 쑤신다.
얼마 전 본 영화 'Wild'에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라는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이 무려 4200km에 이르는 PCT(Pacific Crest Trail)를 걸으며 중간지점에 스탬프를 찍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면서 본 글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몸을 초월할 수 있을까?
걷는 내내 그 생각이 난다.
얼마나 가야 우리가 쉴 공간이 나오려나.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걷는다.
아무리 내가 더 걷자고는 했어도 어둑어둑해지는 길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은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차도를 따라 묵묵히 걷기만 한다.
견디고 있는 것들 많다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견디고 있는 것들 많다
가슴 서늘한 미루나무,
그렁그렁 눈물 머금은 초승달,
엄마 잃은 괭이갈매기, 또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눈 맞고 서 있다
견디고 있는 것들 많다
물은 물대로
땅은 땅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강은 강대로
내일 기다리는 희망이 문 열고 있다
함진원의 < 견딘다는 것 > 전문
뒤에 오시던 고문님께서 랜턴을 꺼내신다.
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강릉 중앙시장에서 안인항까지 걷는 길에 처음,
그리고 지난 번 울진에서 랜턴을 사용했고 이번이 세번째다.
그래도 지금은 해가 많이 길어져서 오후 6시까지는 꿋꿋이 버틸 수 있으니 좋다.
랜턴을 꺼내신 고문님께서는 인도가 없는 7번 국도를 걸으면서 호기롭게 앞장서신다.
저녁이 되자 더 속도를 높이는 자동차 소리만 귀를 때린다.
길 건너편 휴게소 옆에 경보화석박물관이 보인다.
국내 최초이자 최대 화석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지치지 않고 시간이 늦지만 않으면 구경을 해도 좋으련만 아쉬움이 크다.
늘 무슨 핑곗거리는 있다.
이제 눈이 오로지 이정표만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목표로 했던 장사해수욕장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7번 국도 아래쪽으로 개천을 따라 걷는다.
그런데 가까운 거리에 붙은 이정표조차 거리가 틀리네.
정말 욕이 나올 것만 같다.
무너질 것 같은 몸을 끌고 남정면 소재지로 들어섰다.
해수욕장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관광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후 7시,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눈에 보이는 펜션에 숙소를 정하고 배낭을 내려 놓는다.
숙소에 짐을 내리는 것만 해도 살 것 같다.
펜션 주인에게 물어 속 편한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으니 고깃집이지만 된장찌개를 잘 한다고 일러준다.
금성식당은 늦은 시간인데도 지역 사람들로 붐볐다.
된장찌개를 시키려다 오래 무리한 몸에 영양 보충을 해야 한다고, 엊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 잘 먹어야 한다고 소고기찌개를시켰다.
각종 야채에 고추장을 풀고 한우를 넣어 끓인 찌개는 입에 잘 맞았고 다른 반찬들도 깔끔하니 젓가락을 자주 불렀다.
덕분에 기분좋게 저녁을 먹고 다리를 절룩이며 숙소로 들어왔다.
오늘 걸은 거리는 숙소와 식당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걸었던 강릉 다음으로 기록을 세웠다.
30.2km나 걸었군.
족저근막염이 도지려는지 발뒤꿈치가 욱신욱신 쑤신다.
에구, 내일은 늦잠을 자면서 몸을 좀 달래주어야겠구나.
파도소리가 또 금방이라도 내게 덮쳐올것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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