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해파랑길을 걷다 (19, 18코스- 경북 영덕, 포항)

솔뫼들 2015. 2. 2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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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뻣뻣한 몸을 억지로 일으켠다.

힘들어도 일어나야겠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는 것처럼 내게도 걸어야 할 길이 있으니까.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긴다.

날씨도 완전히 풀렸다.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한 바다를 보기 위해 해변으로 나선다.

얼마나 백사장이 길기에 長沙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해변은 생각보다 길게 뻗어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찬란한 아침 바다 앞에서 지난 밤 엉망인 이정표 때문에 투덜거리던 것이 싹 가셨다.

 

 

 바닷내음을 힘껏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한다.

오늘도 힘을 내어 걸어야지.

해변에 서 있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나무 사진도 찍고

얼마 남지 않은 해파랑길 영덕 구간도 안내판에서 확인을 한다.

 

 

 

 길은 해변을 따라 나 있다.

조금 걷자 장사상륙작전 전적지가 나온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당시 북한군의 관심을 동해로 돌리기 위한 위장작전이었단다.

이 작전에서 학도병 200명이 전사했고 그들이 타고 온 문산호는 바다에 가라앉아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잠시나마 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올린다.

한 사람의 힘이 아닌 정말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지금 이 나라, 내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잠시 도로로 나왔던 길은 다시 해안 마을을 거치더니 대게누리공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영덕과 포항의 경계지점에 대게누리공원이 위치해 있다.

역시나 대게를 형상화해 놓았고 사진을 찍기 좋은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얼른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부터 포항시이다.

이제 정말 많이 내려왔구나.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해 속초를 거쳐, 양양과 강릉을 지나고 동해, 삼척도 지났다.

경상북도로 접어들어 울진을 거쳐 영덕도 지나온 것이다.

앞으로 포항, 경주, 울산, 양산, 부산까지 가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겠지.

반을 넘겼다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힘이 나는 것 같다.

 

 

 길은 한동안 편안하게 마을을 따라 이어진다.

돌담인데도 황토빛을 칠해 푸근한 느낌을 주는 집들이 이어져 있다.

마을에서 일체감을 주기 위해 마음을 모았겠지.

내 마음도 덩달아 넉넉해지는 것 같다.

 

 

 

  그런 마을을 지나고 화진해수욕장을 지나자 길이 아닐 것 같은 곳으로 리본이 이어져 있다.

아니 어쩌라는 말이야?

갯바위가 울퉁불퉁한 것 같은 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한동안 걷는다.

걷는 동안에는 바로 옆 공장에서 나오는 역겨운 냄새도 좀 맡아야 하고, 소음도 들어야 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쓰레기도 피해야 하고...

정말 영덕과는 너무나 다른 길이구만.

포항에서는 해파랑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느낌이 확 든다.

해파랑길 아니어도 홍보할 거리가 많다는 말이겠지.

 

마음에 안 드는 불편한 길이 이어지더니 전혀 예상하지 않은 내륙으로 길이 이어진다.

마음 편하게 따라가 보자.

그랬더니만 쭉쭉 뻗은 소나무가 일품인 길이 우리를 맞아 준다.

지나온 길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며칠이고 소나무 내음에 몸을 맡기고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평일임에도 캠핑장에 몇몇 텐트가 있는 걸 보니 정말 '즐긴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숲길이 끝나나 싶더니 이제 산뜻하게 단장한 숙박시설이 연이어 나타난다.

근처에는 해변을 즐길 만한 곳도 없는데 무슨 일이지?

그리고 숙박시설은 있지만 음식점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묵는 공간 아닐까 싶다.

아침이 늦었으니 점심도 늦게 먹자고는 했지만 적당한 시간에 간식을 안 먹었으면 꼬박 허기에 시달릴 뻔 했다.

그러고 보면 오면서 해변에 몰려 있던 쓰레기도 바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남긴 것 아닌가 싶어진다.

여기 보이는 숙소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이고.

그 사람들은 자기가 잡은 물고기로 회를 해 먹거나 매운탕을 끓여 먹지 않을까.

 

 깔끔하고 이국적인 느낌의 펜션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자 이번에는 폐가가 눈에 들어온다.

자식들 모두 공부시켜 도시로 떠나보내고 집과 함께 늙어간 분들이 사셨겠지.

그분들마저 병들어 한 분이 먼저 세상을 등지면 남은 분은 요양보호시설로 가시는 순서가 눈앞에 그려진다.

그것이 단지 누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빈 집이 거기 살았던 사람들과 더불어 쓸쓸하게 다가온다.

 

 

 

 마을 끝자락에는 품위있게 자란 향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누군가 꽤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이런 나무가 있는 마을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걸.

멋진 향나무에 감탄을 하면서 사진을 연신 찍는다.

 

해변을 따라 걷는데 멀리 하늘에 어떤 물체가 떠 있다.

가만히 보니 비행훈련을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커다란 물체에서 새가 똥을 싸듯 낙하산을 떨어뜨리고 있다.

고개를 들고 '하나, 둘, 셋... ' 하고 세어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근처 해변도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키며 바다에서 상륙훈련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는 모양이고.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서 걷다 보니 오늘 점심도 제대로 먹기는 물 건너 갔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점심도 못 먹고 걷다 보니 슬슬 지쳐간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거리를 줄이는 수밖에.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걷고 있는데 눈앞에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자 월포해수욕장이다.

관광지이니 음식점이 있을 거라고, 여기에서 점심을 먹고 조금 더 걷다 상경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고문님께서는 여기에서 오늘 일정을 접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어제 무리를 했으니 오늘은 그만 걷기로 한다.

오늘은 13.2km 걷고 스마트폰 앱을 종료한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그다지 편히 쉬면서 점심을 먹을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설왕설래하다가 포항터미널로 가기 위해서는 흥해를 거쳐 가야 한다기에 일단 흥해까지 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마을마다 서는 모양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 보니 흥해란다.

흥해에서 내려보니 꽤 북적대는 곳이다.

흥해는 이름만 들었지 처음 가 보는 곳인데 환승센터 바로 앞에 시장이 있기에 그쪽으로 발길을 했다.

그런데 먹을 만한 곳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여기서도 택시 기사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택시 기사한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음식점을 찾아 걷는다.

걷는 길 옆으로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영일민속박물관이네.

옛 흥해군의 제헌이 있던 제남헌에 박물관을 지었단다.

 

 

 그런데 박물관 건물보다 건물 앞에 있는 나무 두 그루가 더 눈길을 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

나무는 비록 대수술을 받은 것 같지만 그래도 늠름하다.

정말 나무만큼 늙어서도 품위를 지키는 것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나무를 닮고 싶다.

 

 

 몇 가지 식사와 안주를 파는 식당에서 다리를 쭉 펴고 점심을 먹는다.

여기도 가격 대비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다.

오늘 일정을 잇기 위해 다음 번에 포항을 찾을 때 다시 들러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여유있게 점심을 먹고 환승센터에서 포항터미널로 가는 직행버스를 탄다.

 

 버스는 잘 달린다.

또 졸음이 쏟아진다.

바퀴만 구르면 조는 내 모습이라니...

버스는 포항터미널에 우리를 내려 놓고 떠났다.

여기서는 울진이나 영덕과 달리 서울행 버스가 자주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시간표를 확인하니 바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버스표를 사고 늦은 시간 도착하는 것에 대비해 터미널에서 파는 찰보리빵도 한 상자 샀다.

 

 버스는 경주를 거쳐 쌩쌩 달린다.

그런데 나는 으실으실 춥고 또 졸립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실 이번 해파랑길 출발 전부터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 것 같은데 나만 자꾸 춥다고 느끼는 것이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감기몸살이라도 나려나 싶어 옷을 껴 입고 목에 버프까지 둘러본다.

그러면서 시계를 본다.

서울이 참으로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