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다.
지난 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해서인지 머리가 맑다.
아침을 먹기 전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최고령 어르신이 감기에 걸리셨단다.
어제 비를 맞은 후 따뜻하게 하고 주무시지 못한게 원인이겠지.
걱정이네.
여기는 연중 내내 기온이 섭씨 10~25도 정도이니 4성급 호텔이라도 거의 냉난방 시설이 안 되어 있단다.
난방을 하면 방 공기가 보송보송해지련만 희망사항일 뿐.
거기에 가을임에도 계속 비가 내리니 습기 때문에 더욱 서늘하게 느껴진다.
감기 걸리기 꼭 알맞은 날씨지.
센터장님께 선풍기형 난방기를 부탁했으나 방마다 돌아가기에는 역부족이니 내 차례는 어림도 없다.
나이순대로 어르신을 먼저 챙겨 드린다고 했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30분 먼저 출발했다.
여행도 이제 반을 넘겼다.
베트남은 호수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정말 여기저기 고개만 돌리면 호수가 보인다.
물이 맑지 않아 그리 보기 좋지는 않지만.
그러고 보면 물 속까지 비칠 정도로 물이 맑은 우리나라는 복 받은 나라였네.
첫 일정으로 호수에서 배를 탄단다.
여행 중에 탈거리도 참으로 다양하군.
버스는 당연하고 모노레일에 엘리베이터, 전기차, 케이블카에 오늘은 배까지.
배를 타고 뚜엔람 호수를 한 바퀴 돈다.
호숫가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라는 것이겠지.
건기임에도 물이 많아 수초들은 거의 물에 잠겼다.
하기는 이상기후라지만 사흘째 비가 오고 있으니...
어디나 그렇듯 목이 좋은 곳에는 별장이 들어서 있다.
사업가나 공산당 간부의 별장이겠지.
어제 센터장님한테 이곳 집값을 물어보곤 깜짝 놀랐다.
지나다니는 길가에 있는 깔끔한 전원주택이 한국 돈으로 10억쯤 한단다.
그리 호화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집인데...
농담으로 한국 아파트 팔아 여기 와서 살려 했더니 어림없다는 소리를 하며 웃었는데
베트남 경제 수준을 따지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다른 쪽에는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은 시골 사람들이 사는 허름한 집이 보이고
근처에서 낚시질을 하는 주민들도 보인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그렇지만 사회주의 국가가 빈부격차가 더 심하다는 건 아이러니 아닌가.
이번에는 죽림선원으로 향한다.
이름을 듣고는 대나무숲 안에 사찰이 있는 줄 알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대나무는 한 그루도 안 보인다.
사원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단정치 못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천을 두르게 하는 둥 엄격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오래 전 말레이시아에서 무심코 무슬림 사원인 모스크에 들어갔다가 제재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여자들은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깜빡 했었지.
사원 뒤편에는 뚜엔람 호수를 배 타고 유람할 때 본 황금빛 탑이 있다.
거기에는 석가모니가 '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고 했을 때의 자세를 표현해 놓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일곱발자국을 걸어간 후 천지간에 자기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으로 한 말씀이라는데 요즘은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는 태도'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갈한 사찰에 부지런한 발길을 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고 갖가지 꽃이 만발했다.
정말 꽃의 천국이구만.
익숙한 샐비어도 있고, 과꽃, 천일홍, 풍접초, 흔한 수국, 극락조화, 부겐빌레아 등등.
정말 가화만발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극락조화는 꽃의 모양이 극락조라는 새와 비슷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데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하게 생겼다.
그리 흔한 꽃은 아닌데 모양 때문에 한눈에 알아보게 된다.
'영구불변'이라는 꽃말을 지녔다던가.
이름과 꽃이 있는 장소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부겐빌레아는 차마고도 트레킹을 갔을 때 객잔에서 처음 보았다.
현지가이드는 꽃잎이 세 장이라고 三葉花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겐빌레아였다.
인도에 아주 흔한 꽃이라는 이야기를 곽재구 시인의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이라는 산문집에서 본 적이 있다.
진분홍 꽃잎이 무척이나 정열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부산 언니도 그때 만났었지.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트레킹을 끝내고 객잔 테라스에 앉아 타르초와 룽다가 휘날리는 걸 바라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로.
문득 함께 했던 분들이 그립다.
꽃이 필 때 아무 소리가 없었고
꽃이 질 때 아무 소리가 없었네
맨발인 내가
수북이 쌓인 꽃잎 위를 걸어갈 때
꽃잎들 사이에서 아주 고요한 소리가 들렸네
오래 전
내가 아직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그 소리를 들은 적 있네
외로운 당신이
외로운 길을 만나 흐느낄 때
문득 고요한 그 소리 곁에 있음을
곽재구의 < 부겐빌레아 > 전문
사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간다.
2.7km나 된다고 하니 꽤 긴 거리이다.
발 아래로 소나무숲, 딸기밭, 사람 사는 마을 등이 내려다보인다.
천천히 움직이니 풍경 감상하기에 아주 좋은걸.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버스에 올라 꽃 공원으로 향한다.
꽃 공원은 달랏에서 꽤 유명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다.
가운데 누런물이 고인 호수를 중심으로 갖가지 꽃이 피어 있고 곳곳에 조각상과 분재들로 꾸며 놓았다.
여기 역시 공사중인 곳이 많다.
혹시 베트남 전체가 공사중 팻말을 달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한 바퀴 둘러보고 정문 앞으로 오니 일행 중 여러 명이 '베트남' 하면 떠오르는 모자 '농'을 사서 쓰고 있다.
그러더니만 내게 농을 쓰고 사진을 찍으라며 한 명이 선뜻 빌려 준다.
아오자이도 입으면 훨씬 더 잘 어울리겠는걸.
여기 전통의상 대여점이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농을 보니 시원해 바람이 잘 통할 것 같기도 하고 또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흘러내려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나나 껍질이나 야자잎을 이용해여 주로 만드는 농은 고온다습한 베트남 기후에 꼭 맞는 모자 아닌가 싶다.
오늘같이 비가 오락가락 해서 후텁지근한 날에는...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간다.
메뉴는 쌀국수.
정해진 시간에만 영업을 해서 저녁에나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할 만큼 유명한 집인 모양인데 다행히 시간이 맞았나 보다.
낡은 건물, 탁자도 몇 개 안 되는 소박한 식당에 쌀국수 종류 몇 개 중 수육 쌀국수를 시켰다.
가격이 한국 돈으로 2,400원쯤 한다.
우리나라에 가면 10,000원쯤은 하겠는걸.
닭뼈 육수에 양파, 숙주, 양상추, 고수 등을 취향껏 넣고 먹는 쌀국수는 생각보다 국물이 시원했다.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흐뭇한 얼굴로 식당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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