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을 동안 잘 참아주던 비가 또 슬금슬금 내리기 시작한다.
비에 대비해 옷과 배낭을 준비하고 길로 들어선다.
비 속에서 쉼없이 걷는다.
초반에는 황량하더니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들꽃들이 많다.
초원의 꽃들과 눈맞춤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천상의 화원이란 바로 이런데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잠깐 소싸움도 구경을 한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는데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소 두 마리가 뿔을 들이대고 한참 실랑이를 한다.
그냥 살기도 힘든데 늬들은 왜 싸우는 거니?
길인지 진창인지 내리는 비 때문에 질척거리는 길을 걷는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고, 안개는 꼬리를 물고 봉우리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슬쩍 스쳐가는 안개를 지붕에 인 마을과 포장도로가 보인다.
마을이 보인다는 건 다 내려왔다는 말이겠지.
계곡가에 이르러 잠시 쉰다.
정말 쉬지도 않고 정신없이 내려왔네.
익살스러운 표정의 가이드가 이정표를 보고 설명을 한다.
계곡 옆으로 난 널찍하고 평탄한 길을 따라 걷는다.
길 옆으로 있는 조그만 집은 무엇일까?
또 호기심이 발동한다.
목동이 머무는 공간인가?
목동이 머무는 공간이라면 밤에 내려가는 기온 때문에 난방장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게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설마 히말라야 롯지에서처럼 짐승의 마른 똥을 주워 연료로 사용하지는 않겠지.
아주 단순해 보이기에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포장도로로 내려와 10분쯤 걸었을까?
'라 폴리'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오늘 호텔 이름은 '에델바이스'이다.
그러고 보니 에델바이스가 피는 계절은 아니지만 에델바이스는 알프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꽃 아닌가.
이름도 예쁜 호텔에 여장을 푸는데 숙소가 편한게 얼마나 고마운지...
오늘 걸은 거리는 14km란다.
하루 걷는 거리는 대략 비슷한데 날씨에 따라 몸 상태가 달라지니 피로도도 달라지겠지.
오늘도 등산화는 보일러실에 벗어 놓는다.
속까지 젖지는 않았지만 겉이라도 보송보송 마르면 좋겠지.
며칠 내리 신은 등산화는 진흙에, 짐승 배설물에 도무지 제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등산화도 주인 따라 고생이 심하구나.
축축한 옷을 널어 놓고, 씻고 난 다음 구경 삼아 어슬렁어슬렁 마을을 돌아다닌다.
실비는 아직도 내리는데 특별히 볼데도 없고 일찍 문을 닫는데도 많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살짝 춥다.
어제 종일 비를 맞은 후로는 추운게 싫어 다시 호텔로 들어온다.
와이파이가 되는 리빙룸에서 오랜만에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데 런던에서 왔다는 트레커가 말을 건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자기 꺼라 하네.
전화기를 가지고 가면 될 일이지 누굴 도둑으로 아나?
잠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박사는 분명히 그 사람은 삼성이 아닌 샤오미를 쓸 거란다.
수준 떨어지게.
갑자기 푸훗 웃음이 난다.
그리고 보니 앞에 보이는 텔레비전은 소니이다.
지금까지 묵은 호텔마다 텔레비전이 한국 것이어서 한껏 고무되었었는데...
저녁 식사 후 방에 들어와 강박사 부녀와 한 잔 하기로 했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 잔 되더니 급기야 와인 한 병과 위스키 한 병을 바닥내고 끝이 났다.
술기운에 고문님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계시고, 강박사는 한 이야기 도돌이표 붙여 또 하고...
그래도 두 분은 즐겁단다.
에구, 술 당하는 장사 없다니까요.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빙하 녹은 물 내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우는 스위스의 밤이다.
중립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공연히 스위스는 냉정하고 싸늘하게 느껴지는데 공연한 생각이겠지.
이 생각 저 생각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눈꺼풀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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