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도 눈도 조금 잦아들었다.
사정없이 배에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있으니 무어라도 입에 넣어야 할 판이다.
가이드 비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쉴 수 있는 곳이라 싶은지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곳이다.
가이드 비는 자기도 먹으면서 내게 비스킷을 내민다.
비스킷을 받아 먹다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팀에 자극 받아 우리도 배낭을 내려놓고 제대로 먹자고 했다.
보온병에 담아 온 물로 커피를 타서 가까운 사람에게 한잔씩 돌린다.
이럴 때는 쓴 커피보다는 달콤한 커피가 당기지.
뜨겁고 달콤한 것이 목으로 넘어가니 전신이 금세 반응을 보인다.
이제야 살 것 같다고.
오늘도 점심을 제대로 못 먹고 이렇게 때우고 마는구나.
그러니 걷기 불편하고, 춥고, 거추장스러운 점을 뺀다고 하더라도
날씨가 좋다는 건 점심을 챙겨 먹을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도 있겠군.
그래도 먹고 나자 조금 기운이 난다.
부슬비는 살그머니 내리는데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을 한다.
강박사는 풀밭에 있는 사나워 보이는 소 사진을 찍으며
방울을 매달기 위한 목사리가 너무 넓어서 목디스크 걸릴 일은 없겠다는 농담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키가 작은 어떤 분이 자기는 목이 없어 목디스크 걸릴 일이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쯤 걸었을까?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운전기사 모건이 마중을 나왔다.
거의 다 왔다는 말 아닐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모건은 잘 생긴데다 친절하고 선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강박사는 모건을 보고 헐리우드 영화배우 톰 크루즈를 닮았다고 한다.
정말 그만큼 멋지게 생겼다.
날씨와 벌이던 싸움도 끝났다고 여겨 가볍게 걷는데 생각보다 머네.
그러면 모건은 혼자서 꽤 많이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되는군.
멀거니 차에서 기다리느니 운동 삼아 왔을 수도 있겠지만 지루했겠다.
드디어 도로로 내려섰다.
오늘은 15km를 걸었단다.
내려오니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차를 타고 막 출발한다.
잠깐 쉬면서 주변 상점과 경치를 구경한다
그런데 누군가 하는 말에 의하면 모건을 만나 내려올 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고 한다.
일행 중 한 명이 모건에게 자기 배낭을 대신 져 달라고 했다나.
그는 운전기사일 뿐인데 자기 종을 부리듯이 생각을 했으니 거절을 당했고 그런 무례함에 모건은 기분이 상했겠지.
한국인이 도매금으로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외국에 나오면 특히 민간 외교관이라 생각을 하고 조심을 해야 하는데...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나라 트레커를 만났다.
오는 중에도 잠깐 보았던 것 같은데 4명이 개별적으로 TMB 풀코스를 걷고 있단다.
남자 1명에 여자 3명인데 남자가 모든 자료 준비 등을 다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처럼 하이라이트 코스를 걷는게 아니라 풀코스를 걷는단다.
풀코스는 대개 9일을 걷는데 걷는 건 그렇다치고 배낭 무게에 치일 것 같은데
어찌 다닐까?
그들의 등에 있는 배낭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을 했다.
호텔이라고 씌어 있기에 그런가 했더니만 多人室 산장이란다.
지난 번 산장이 불편한 것이 많아 걱정을 했더니만 8인실에 짐을 풀었는데 그래도 지난 번보다는 낫다.
널찍하고 깔끔해 다행이다.
축축해진 옷은 침대 모서리에 걸쳐서 말린다.
이번에는 빨래를 안 하기로 했다.
8명이 써야 하니 말릴 만한 공간도 없고, 내일 하루만 더 걸으면 되니 그냥 싸 가지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제처럼 밖에 비가 내리고 바로 옆에 계곡이 흐르는데도 실내는 건조해서 빨래가 잘 마른다는 것.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오늘도 빨래를 한다.
옷에 묻은 나의 체온을
쩔었던 시간들을 흔들어 빤다.
비누 거품 속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나의 어제여
물이 되어 일어서는 희디흰 설레임이여
다시 세례 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이해인의 < 빨래 > 전문
자리를 정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여성 전용인 줄 알았던 방에 프랑스인 부부가 들어왔다.
별안간 분위기가 달라졌네.
그런데 고약한 냄새가 나기에 코를 막고 보았더니 하루 종일 신은 양말을 빨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머리에 걸쳐 놓는 것 아닌가.
내가 무어라 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프랑스말로는 당연히 못 하는데 영어로 단어 몇 개 주섬주섬 할까 하다가 그냥 포기해 버렸다.
지금은 괴롭지만 코라는 녀석은 원래 적응을 잘 하지 않는가.
후각이 금세 마비되겠지.
자기네들도 괴로울텐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땀을 안 흘렸으니 샤워장이 지난 번처럼 남녀공용에 좁고 불편하면 하루 참을 거라고 했더니
먼저 다녀온 사람이 여기는 남녀가 분리되어 있고 훨씬 넓다고 한다.
그러면 핑계거리가 없으니 씻어야겠네.
씻고 짐 정리를 해도 남는 시간에 바깥 산책을 하다가 추워서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책을 한 권 들고 휴게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책을 본다.
오랜만에 책에 빠지니 시간이 잘 간다.
책을 보시던 고문님께서 갑자기 옆에 체중계가 있다고 하신다.
그러면 강박사를 불러야 하는데...
여행을 하고 나면 늘 체중이 늘곤 하는데 체중 감량이 목표였다는 강박사에게 퉁을 주었으니 확인을 해 봐야겠지.
그런데 체중계에 올라선 고문님,
숫자가 안 나오니 이상하다시며 발로 무언가를 툭 쳤는데 그 순간 '윙' 하는 굉음이 나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고 보니 삼성 물걸레 청소기를 충전중이었는데 얼마나 황당한지...
덕분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웃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말 재미있는 사건이다.
저녁을 먹고 맥주를 한 잔 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일찍 자는 분위기에 살금살금 침대로 기어들어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메모하고 나도 잠을 청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첫날 빼고는 잠을 잘 자고 있다는 것.
옆 침상의 살짝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눈을 감는다.
'여행기,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프스 TMB를 걷다 ; 마지막날 (포클라즈 고개 - 샤모니) 20160715 (2) (0) | 2016.08.19 |
---|---|
알프스 TMB를 걷다 ; 마지막날 ( 포클라즈 고개 - 샤모니) 20160715 (1) (0) | 2016.08.17 |
알프스 TMB를 걷다 ; 다섯째날 ( 라 폴리 - 포클라즈 고개 ) 20160714 (1) (0) | 2016.08.12 |
알프스 TMB를 걷다 ; 넷째날 ( 쿠르마이어 - 라 폴리 ) 20160713 (4) (0) | 2016.08.11 |
알프스 TMB를 걷다 ; 넷째날 ( 쿠르마이어 - 라 폴리 ) 20160713 (3) (0) | 2016.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