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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산행기

알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한 섬, 欲知島에서 (3)

by 솔뫼들 2016.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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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봉 이정표를 따라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계속 오르막길이다.

봄볕을 등에 지고 걷는 길은 그야말로 따끈따끈하다.

 

 

 갈림길이 나오자 급기야 친구는 그만 걷자고 한다.

그러면 욕지항까지 가야 하는데 버스가 섬에 자주 있을 턱이 없고

도로를 따라 걷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또 일찍 간다고 하더라도 뱃시간까지 남는 시간은 무얼 하며 보낸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참아보자고 친구를 설득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숲이 그늘이라는 것이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고장난 자동차처럼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긴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1.2km라면 지금쯤 대기봉 정상에 도착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길 옆에 대기봉 800m라고 쓰인 허름한 나무판이 보인다.

그럼 지금까지 겨우 400m 왔다는 말이야?

미쳤군.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도대체 1.2km가 왜 이렇게 먼 거야?

홧김에 나무판을 한껏 팽개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그렇다고 내려갈 수는 없으니 아무 생각 말고 앞만 보고 걷자.

계속 오르막길이다.

바위가 나오고 줄까지 드리워져 있는 길이 나타난다.

우습게 보았는데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었군.

 

 그렇게 걷다 보니 오후 2시 35분 대기봉(해발 355m)에 도착했다.

정말 어렵게 왔구나.

배낭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며 친구를 기다린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친구가 올라왔다.

친구 역시 대기봉 800m를 알리던 나무판 이야기를 하며 투덜거린다.

누군가 잘못된 것을 툭 던져 놓은 것 같다면서.

 

 

 이제는 천왕봉(해발 392m)을 향해 갈 차례이다.

내려가는 길이니 발길이 가볍다.

금방 갈림길에 도착하니 친구는 배낭을 두고 천왕봉에 다녀오란다.

자기는 여기에서 배낭 지키며 쉬고 있겠다고.

천왕봉까지는 380m.

구시렁구시렁 힘든 일은 나만 시키네그려.

산길에서 만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배낭을 가져갈 사람도 없고

설사 산길에 사람이 있더라도 배낭이 무거워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데...

 

 배낭을 내려놓고 뛰다시피 걷는다.

조금 가자 곧추선 계단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도 맨몸이니 거칠 것 없이 쉬지 않고 올라간다.

 

 끝까지 올라가니 군사지역이라서 정상은 올라갈 수 없고 통제사 巖刻文에 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조선 숙종 15년 통제사 이세선이 욕지도에 진영을 설치하기 위하여 현지 답사한 것을 기념하고자 바위에 글을 새겼다고 한다.

암각문은 장구한 세월이 흘러 알아보기 힘들게 풍화되었으나 史料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말도 함께.

 

 

 계단길 꼭대기에서 친구가 있는 곳을 내려다보다 후다닥 뛰어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이니 당연히 더 빠르지.

친구는 봄볕을 받으며 한가롭게 쉬고 있는데

"혼자 쓸쓸해서 눈물 흘렸지?"

엉뚱한 내 말에 친구가 피식 웃는다.

 

 갈림길에서 증명사진을 한 장 찍고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내려가는 길 옆으로 편백나무가 줄느런하게 서 있다.

산림욕 효과가 좋다고 하여 조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멀리 시선을 주니 산비탈을 따라 만들어진 황토밭이 자연스러운 무늬를 형성하고 있다.

저 땅을 일구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저 경사진 밭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짓기에는 또 얼마나 힘이 들 것인가.

저런 황토밭에서는 고구마나 땅콩, 감자 등을 재배하기 좋은데...

시골 출신답게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태고암에 도착했다.

잠깐 태고암을 둘러보고 하산길을 따라 걷는다.

배 타는 곳까지 2km라 했으니 천천히 가도 되리라.

갑자기 느긋해져서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겹동백이 탐스러워 또 눈길을 멈춘다.

 

 

 약과봉(해발 315m)을 올라가는 갈림길이다.

약과봉까지 1.8km라는데 오늘은 생략이다.

아까 대기봉 오를 때 1.2km도 그리 멀게 느껴졌는데 지금 이렇게 내려와서 남은 체력으로 1.8km 오르막길을 다시 가려면 진짜 까마득한 일이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고 체력도 이제 바닥을 보인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한적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길 옆 계곡은 얼마나 가물었는지 물 한 방울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힘차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 신통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다 보니 고구마 저온창고가 보인다.

아하! 층층이 일군 황토밭에 고구마를 심는구나.

그래서 통영에서는 '빼떼기죽'이라는, 고구마로 끓인 죽이 생겨난 것이고.

한때 구황식물로 알려진 감자나 고구마가 이제 건강식품으로 다가왔으니 참 좋은 세월이다.

 

먼당밭 쟁기 갈아 고랑고랑 북을 치고

텃밭에서 순을 따다 비 오는 날 심었더니

이슬 맞고 햇살 받아 남몰래 자랐다네

 

덮은 넝쿨 걷어내니 흙두덕이 터져 있어

주렁주렁 캐고 뽑아 찬물에 씻겼더니

불그스레 홍조 띠고 뽀송뽀송 탐스럽네

 

모랑모랑 가마솥에 소쿠리로 담아내어

신김치 곁들여서 허기를 채우다가

이웃집 돌담 넘어 순이에게 건네주네

 

폭신폭신 감칠맛은 밤보다 고소하여

기나긴 겨울철엔 동치미와 어울리고

빼떼기 꽁지 모아 쪄 먹어도 일품이네

 

코흘리개 그 시절엔 우리 모두 양식이고

배불리 먹을 것은 이것 말고 또 있던가

요새는 세상 좋아 별미로 찾는다네

 

 해풍에 간이 들고 게미가 있다 하여

순이가 시집 갈 적 울면서 챙겨가는

그대 이름 바다의 땅 욕지도 고매로다!

 

            주용환의 < 고구마 > 전문

 

 오른편으로 상수도사업소를 지나 갈림길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를 따라 죽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골목길로 이어진다.

학교 건물도 나오고, 면사무소도 보이고, 무너져가는 건물도 눈에 들어오고...

 

 

 오후 3시 40분 드디어 욕지항에 도착했다.

오늘도 10km 가량 걸었다.

늘 그렇듯 일단 배표를 산 후 맥주 한 캔 앞에 두고 바람을 피해 햇살 가득한 곳에 앉았다.

제대로 운동을 하고 났으니 졸음이 살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