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해파랑길을 걷다 (1코스- 부산광역시)

솔뫼들 2015. 6. 3. 09:06
728x90

 느지막히 일어나 준비를 하고 오전 9시 20분에 숙소를 나서 택시를 탔다.

어제 걷기를 멈춘 남천 마리나 건물 앞에서 택시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걸을 준비를 한다.

오늘 하늘을 보니 꽤나 덥게 생겼군.

부지런히 걸으면 오전에 걷기를 끝낼 수 있을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오전 9시 40분, 해파랑길 종주 마지막날 첫발을 뗐다.

어제 탈이 난 다리는 숙면을 취하지 못 했어도 쉬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부산 구간을 걸으면서 만나기 어려웠던 해파랑길 이정표를 만났다.

여기는 해파랑길과 갈맷길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양이다.

이미 한번 걸어서 알고 있는 길이기도 하지만 갈맷길 리본이 워낙 많이 달려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다.

 

 걸으면서 보니 용호유람선터미널이 보인다.

바다에 면한 쪽으로는 화려한 유람선이 정박해 있고.

흰빛이 산뜻한 유람선을 타고 바다를 가르면 덥게 느껴지지도 않을텐데...

멋있어 보이는 유람선을 바라보며 생각만 바다를 달린다.

 

 

 오전 10시 10분 동생말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오륙도 해맞이공원까지 4.6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정말 종착점이 얼마 안 남았구나.

 

 없던 힘이라도 억지로 내보려 기를 쓰며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이 구간은 전에 걸을 때도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바닷가 절경을 본다고는 해도 더운 날씨에 땀을 줄줄 흘리며 걷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산길에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수없이 계단이 나오니 지치는 것이 당연하지.

각오를 단단히 한다고 했는데도 초반부터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길에 질려 버린다.

 

 

 임진왜란 당시 기생 두 명이 왜장을 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는데서 유래했다는 二妓臺를 지나

해녀막사를 지난다.

해녀 막사 앞에서는 오늘도 해녀들이 잡아왔다는 해물을 앞에 놓고 호객행위를 하느라 바쁘다.

해삼이 싱싱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침부터 주저앉아 먹고 마실 수는 없으니 그만 통과.

공룡 발자국인가 싶었던 바위 구멍이 파도가 만들어낸 작품인 '돌개구멍'이라고 해서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발길을 옮긴다.

 

 

 어울마당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계속 마이크소리가 들린다 했더니만 어울마당에서 택시기사들의 무슨 행사가 열리는 것 같았다.

부산스러운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더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길은 바닷가를 따라 난 뙤약병 아래 데크였다가 산길 그늘이었다가 반복된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수시로 물을 마시느라 바쁜데

그나마 산 속으로 들어가면 그늘인데다 바람이 불어주어 잠시나마 땀을 식힐 수 있다.

 

 이기대 공원 구간은 많이 알려진 구간이라서인지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의 무리가 꽤 많다.

벌써 도시락을 먹기 위해 해변가 바위로 내려간 사람, 간간이 있는 전망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사람, 그것도 아니면 숲속 벤치에 앉은 사람 등등.

우리는 어차피 오륙도 해맞이공원까지는 점심 먹기 전에 걸어야 하니 앞만 보고 걷는다.

 

 

 농바위를 지났다.

슬슬 지쳐가니 바닷가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익숙한 풍경의 하나일 뿐.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았나 가는 길에 쓰인 거리 표시만 유심히 살피게 된다.

그런 와중에 계속 빗나가는 거리 표시는 얼마나 짜증이 나게 하는지..,

얼마나 성의가 없으면 바로 옆에 있는 해파랑길 거리와 갈맷길 거리 표시가 다를 수 있는 거지?

정말 무심한 것도 정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고서도 부산의 대표적인 걷기 좋은 길이라고 홍보를 하겠지.

심술이 나서 고문님께서 오시자 투덜거린다.

 

 멀리 오륙도가 보이니 종착점이 머지는 않았나 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또는 밀물과 썰물 때에 섬이 5개로 보였다가 6개로 보였다가 한대서 오륙도라는 이름을 얻었다던가.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걷는다.

 

 

 드디어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도착했다.

발 밑에 있는 생태연못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은 나도 여유를 찾고 사진도 찍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1코스 시작점인 해파랑길 안내판 앞에서 시계를 보니 정각 12시이다.

스마트폰 거리 측정 앱은 6.45km를 가리킨다.

드디어 770km라는 해파랑길 종주를 끝냈구나.

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까지 합하면 족히 800km는 되리라.

주마등같이 지나가는 고생스런 시간을 떠올리면 감개무량할 것 같은데 무덤덤하다.

아니 조금 허탈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뿌듯해질지도 모르지만.

 

 

 고문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려 해파랑 카페로 이동했다.

점심을 늦게 먹더라도 일단 더위를 식히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걷는 동안 한번도 제대로 쉬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잠시 다리 운동도 하고 불이 붙은 것 같은 발바닥도 쉬게 한다.

조금 쉬었다 싶어져 바람 부는 해맞이공원으로 향했다.

몸을 휘청이게 만들 정도의 바람 앞이지만 해파랑길 종주를 기념하는 멋진 사진을 한장 남기고 싶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만세를 부르며 섰다.

만세!

 

 

 번갈아 사진을 찍은 후 뒤돌아나오다가 기념품을 언급하는 안내문을 보았다.

해파랑길 안내사무소에 가면 해파랑길 기념품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에 어디를 가든 기념품을 거의 안 사는 성격인데 워낙 고생스럽게 걸어서인지 무언가 남기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해파랑길 안내사무소는 점심시간이라 잠시 문을 닫았네.

 

 해파랑 카페에서 30분 가량을 기다려 해파랑길 안내사무소를 찾았다.

그런데 해파랑길 기념품은 없단다.

부산 남구 관련 기념품만 있다고.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린다.

 

 

 이제 정말 작년 9월에 시작한 일정이 모두 끝났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좋게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

누가 내게 해파랑길을 걸으며 무엇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었다고?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고?

아니 슬그머니 내 몸으로 들어와 한 몸처럼 되어버린 고통과 직면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는 시간 아니었을까?

 

가장 고생한 발에 족저근막염이 남았고 모르기는 해도 다리에 근육이 확실하게 붙었겠지.

아무래도 이번 여름에 반바지 입기는 틀린 것 같다.

지하철에서 비몽사몽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스르르 잠에 빠진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고은의 < 낯선 곳>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