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휴! 여러 번 한숨을 쉽니다.
이렇게 힘든 곳이라면 산행 시작 전에 한번쯤 더 생각해 볼 곳 아닌가 싶습니다.
뭣 모르고 왔다가 고생이 자심합니다.
물이 허리까지 올라오고 물살이 세면 공포심이 몰려오지요.
이제 계곡을 그만 건너고 싶어지는데 어디에도 이정표가 없습니다.
이렇게 찾는 사람이 많은데 불친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휴대전화 불통지역 표시가 있더니만 드디어 휴대전화 통화가능지역 표시가 나옵니다.
어느 정도 내려왔다는 말이겠지요.
열 번쯤 물을 건넜을까 하니 친구는 열 번 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기야 친구는 실수로 계곡을 왔다갔다 했으니 저보다 두 번은 더 물을 건넜네요.

당연하겠지만 하류로 내려갈수록 물이 깊어집니다.
물이 허리까지 올라오니 배낭 아랫부분도 젖습니다.
신경이 쓰여 배낭 끈을 조이고 휴대전화를 매단 주머니도 지퍼를 채웁니다.
몸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장비도 덜 젖으면 좋겠지요.
가다 보니 꽤 넓은 沼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누가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군요.
자세히 보니 안내대장이었습니다.
우리를 보고는 여기가 편하게 놀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라고 놀다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와 저는 물에 혼비백산, 그저 얼른 내려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사실 계곡물과 벼랑이 빚어내는 경치가 꽤 근사한데도 즐길 여유가 없더라고요.
더 내려가서 계곡가 그늘에서 잠깐 쉽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간식 생각은 없고 물을 마시면서 정신을 차려 봅니다.
내려오는 동안 너무 긴장해서 정말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계곡을 내려오는 동안 전혀 덥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가 반복을 하고, 산길은 나무가 우거져서 햇볕을 볼 일이 없으니까요.
거기에 계곡 물소리가 사방을 점령해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지에서 피서는 제대로 하는 셈입니다.
무심코 산길을 걷다 보니 허리가 멀쩡합니다.
어제 시장 본 걸 차에서 꺼내다가 삐끗 했는지 허리에 담이 걸렸거든요.
저도 모르게 계속 허리에 손을 올리게 되고 조심을 했는데 힘겹게 계곡을 건너는 동안 허리 통증이 말끔해졌습니다.
희한하네요.
'水 치료' 효과가 아주 좋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내려가면서 보니 일상복 차림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본격적인 산행이 아니라 계곡에 놀러오는 차림의 젊은이들로 보아 계곡도 곧 끝나지 않을까 기대를 해 봅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공기가 달라진다 싶었습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확 밀려옵니다.
신선들의 세계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느낌이랄까요.
제발 이제 물을 안 건너고 싶다고 한 다음에도 서너 번은 물을 건넜나 봅니다.
오후 5시, 드디어 계곡이 끝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有終의 美를 거두라는 의미인지 마지막으로 허리까지 오는 물을 건너야 합니다.
물이 많아져서인지 계곡의 폭도 넓고, 물살도 만만치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통신이 가능한 곳이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희덕의 < 산속에서 > 전문
마지막이니 계곡을 건너기 전에 쉬어가자 했더니 친구가 아예 건너가서 쉬자고 합니다.
우리는 몸은 물론 입은 옷과 배낭 등등 말려야 할 것이 많으니까요.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싶어서 건너가서 모래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옆에 보니 인제군에서 나와서 구명조끼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대여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획(?)을 하는데 아침가리골 중간에 이정표는 왜 안 할까 다시 한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여유있게 자리를 잡고 짐을 정리합니다.
다행히 배낭 아랫부분만 젖어서 지갑 등 중요한 것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젖은 양말은 벗어서 비닐봉지에 넣고, 스틱도 가능하면 말리기 위해 햇살에 널어 놓습니다.
1시간쯤 시간이 있으니 기능성 의류는 잘 마르겠지요.
그런 다음 과일을 먹으면서 한숨 돌립니다.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봅니다.
다음 주에 다시 여기를 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친구는 고개를 휘휘 젓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거든요.
혹시 나중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그즈음 인제의 강수량과 계곡물의 깊이를 확인한 다음 와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무사히 내려왔으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기는 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니까요.
우리가 산행을 마무리한 갈터는 숙박업소도 많고, 음식점도 많습니다.
유원지 같은 느낌이 나는군요.
많은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계곡을 즐기는지 주변이 북적거립니다.

오후 6시 버스는 정확하게 서울로 출발합니다.
오는 길에 들으니 다른 안내산악회 버스는 인제에 12시가 넘겨 도착하는 바람에 제대로 산행을 못 하고 우리가 하산하는 지점에 내려서 계곡만 즐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네요.
친구는 귀경 버스 안에서 친한 친구에게 아침가리골 계곡 산행을 권하는 문자를 보냅니다.
본인이 계곡을 건너는 사진과 함께 말이지요.
사실 특별한 경험이기는 하지요.
여름 한 철 물이 많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고요.
산을 좋아하는 그 친구도 곧 특별한 경험에 동참하겠군요.
올 때와는 다르게 버스가 잘 달려 사당역에 오후 9시에 도착했습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친구와 헤어진 후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군요.
집에 도착하면 아마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들지 않을까 싶은 날입니다.
꿈 속에서 또 계곡을 허우적거리며 건너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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