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오늘의 시- 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솔뫼들 2025. 4. 2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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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곽재구

 

어릴 적엔

강 건너 산비탈 마을

기차가 지나갈 때

손 흔들었지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던 이가

바람에 모자를 놓쳤을 때

보기 좋았지

 

어른이 되어 기차를 타면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고 싶었지

강 건너 앵두꽃 핀 마을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

창밖으로 하얀 모자를 흔들다

명주바람에 놓아주고 싶었지

 

모자를 열개쯤 준비해

강마을의 아이가 손을 흔들 때

하나씩 바람에 날리는 거야

 

KTX는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달리지

손을 흔드는 아이도 없지

 

기차는 좀 느리게 달려야 해

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 해

사람이 기차고

기차가 사람이야

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거 부끄러워

 

시속 삼십 킬로미터면 강마을

아이들과 손 흔들 수 있어

시속 이십 킬로미터 구간에선

초원의 꽃들과 인사 나눌 수 있지

시속 십 킬로미터면 초원의 소들에게

안녕, 무슨 풀을 좋아해? 물을 수 있어

 

목포에서 신의주

6박 7일에 달리는 거야

우리나라 강마을 아이들 모두 모여

하얗게 손 흔들다

모자를 찾으러 강물 속 풍덩 뛰어들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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