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길이 험해서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선두에 서게 되었네요.
강선생님은 뒤에서 부인과 함께 오시고요.
험한 산에 익숙하지 않은 부인이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부인이 벌써 한번 넘어지셨거든요.

일본은 산길에 인위적인 시설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되는 사람만 다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산길이 너무 험해서인지 계단이 보이는군요.
돌에 신경을 쓰다 계단을 만나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그만큼 길이 위험하다는 말이겠지요.
최대표와 친구가 계단 위에 섰습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두 분 모습이 멋진걸요.
힘든 걸 참은 대가이겠지요.
그래서 찰칵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이제 나무들 키가 작아졌습니다.
수목한계선에 이른 것 같네요.
수목한계선은 기후나 풍토에 따라 약간 다르기는 합니다.
8합목이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정상까지 1.2km 남았군요.
희망이 보입니다.
길은 점점 고약해져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듭니다.
살짝 긴장을 하고 발 아래 바위를 보며 걷다가 위쪽 바위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습니다.
아래 바위만 보다가 위쪽 바위에 강타를 당했네요.
방심했습니다.

바로 뒤에 오던 최대표가 소리쳤습니다.
"바위가 깨졌다."
어제 최대표가 넘어질 때 제가 했던 농담을 되갚은 모양새입니다.
글쎄요.
바위가 깨졌는지 제 머리가 깨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에 혹 하나는 당첨이군요.
바닥은 너덜이요, 위쪽은 너설인 지역이 한참 이어집니다.
자세를 낮추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올라갑니다.
정상 가까이 가니 다른 방향에서 온 사람들인지 일본인 트레커가 꽤 보입니다.
그들 역시 힘들어서 가다 한숨 돌리고, 가다 한숨 돌리고 하네요.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힘든데 힘든 걸 이겨낼 힘과 정신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정상을 올려다보면 아주 편안한 숲으로 길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급경사를 우회하지도 않고 거의 수직으로 오르도록 길이 나 있네요.
난이도가 무척 높은 길입니다.
뒤따라오던 친구는 너무 힘이 들어 못 가겠다고 합니다.
친구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투정 섞인 소리라는 걸 알지만 마음이 쓰이네요.
무척 고통스럽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말로만 그렇게 하지 강단이 있어서 잘 참아내리라 믿습니다.
산행은 정말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 아니던가요.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만 해발 2346m의 '마나이타구라'라고 하네요.
바로 옆에 있는 히우치다케보다 10m 낮습니다.
그래도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에 기운이 납니다.
사진을 찍고 오제누마 호수 풍경을 감상합니다.
그러는 새 뒤편에서 스멀스멀 안개가 올라오는군요.
정말 큰 산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정상을 향해 진군합니다.
급경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하는 길입니다.
만만해 보이지는 않지만 정상이 코 앞에 있으니 힘을 내어 봅니다.
드디어 오전 11시 20분 해발 2356m인 히우치다케에 도착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한참 쉬었고, 촬영을 위해 또 쉬는 바람에 산장에서 정상까지 3시간 50분 걸렸습니다.
걷는 속도 자체가 그리 느린 편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인원이 단출하고 나름대로 잘 걷는 사람들이라 큰 무리는 없었지요.

정상석 앞에서 번갈아 사진을 찍습니다.
가끔은 이런 사진을 찍기 위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니까요.
줄을 서면서까지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건 내가 여기까지 고생해서 잘 올라왔다는 성취감을 대신하는 것이겠지요.
더군다나 여기는 다시 올 가능성이 별로 없는 곳이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마나이타구라에는 일본인 트레커들이 많았는데 여기 히우치다케에는 일본인들이 거의 없습니다.
사진 몇 장 찍은 다음 내려간 사람 외에는 말이지요.
히우치다케 정상은 온전히 우리 일행과 잠자리 차지가 되었군요.
자연 환경이 좋아서인지 어제 오제누마 호수 주변에도 그렇더니만 나비와 잠자리가 참 많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잠자리 무리를 보니 참 좋은 곳이구나 싶습니다.
최대표는 우리가 걸어온, 마나이타구라로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영남알프스의 신불재 같다고 합니다.
억새가 일렁이는 신불재 능선이 떠오르는군요.
신불재는 참으로 근사한 풍광을 선사하는 곳이지요.
올해 억새가 나부끼는 계절에 신불재를 다시 한번 찾아가 볼까요?
신불재에 가면 자연스레 히우치다케를 떠올리겠네요.

사진을 찍고 경치 구경을 하다가 여기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햇볕 가릴 나무 하나 없고 울퉁불퉁 험상궂은 돌들이 널린 곳입니다.
무겁지만 내내 지고 다니던 의자를 꺼내 편안하게 앉아 봅니다.
배낭이 무거워서 힘들었겠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보고는 일행이 부러워하는군요.
사실 힘든 산행에서 배낭 무게는 꽤 중요합니다.
메리설산 갔을 때 제 룸메이트는 열흘 정도 되는 트레킹 일정에 달랑 25L정도 되는 배낭 하나만 메고 오셨더군요.
저보다 무려 15살이나 나이가 많았는데 간식은 제게 얻어 먹고, 옷은 빨아 입든지 아니면 그냥 계속 입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산에 다닐 때 수저 무게 하나도 무거워서 손잡이를 짧게 잘라 가지고 다닌다고 했던게 기억납니다.
그분이 그때 70세이셨으니 저도 그 나이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 나이에 제가 고산증세가 나타나는 해발 4000m 고지를 걸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겠지요.
얼마 전 연락했을 때 그때가 좋았다 하시던 그 분 말씀이 기억납니다.

산장에서 싸준 도시락을 열어 보니 주먹밥이군요.
생선 튀김처럼 눅눅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 싶습니다.
주먹밥 두 덩이 중 하나에는 매실장아찌가 들어 있고 하나는 밥만 있습니다.
매실장아찌조차 매정하게 하나만 넣었네요.
그래도 고등어구이 한 조각에 소시지 하나, 단무지가 두 조각 들어 있어서 반참 삼아 먹습니다.
운동량이 많아서 그런지 꿀맛입니다.
산꼭대기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지요.
또 열심히 먹어야 내려갈 에너지를 얻게 될 거고요.
하산길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을까요?
올라올 때 생각을 하면 그리 친절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걱정 반, 기대 반이지만 그래도 내려가는 길이니 올라올 때보다 힘은 덜 들 것이라면서 위안을 해 봅니다.

오제누마 호수를 내려다봅니다.
이제 오제누마 호수와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지요.
우리가 도시락을 먹을 동안 오제누마 호수는 살짝 안개에 덮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개와 친구가 되는 오제누마 호수를 마음에 담아 두려고 오래 내려다봅니다
'여행기,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오제 트레킹 (10) - 히우치다케 산행 (2) | 2023.11.04 |
---|---|
일본 오제 트레킹 (9) - 히우치다케 산행 (1) | 2023.11.03 |
일본 오제 트레킹 (7) - 히우치다케 산행 (2) | 2023.11.01 |
일본 오제 트레킹 (6) - 히우치다케 산행 (2) | 2023.10.31 |
일본 오제 트레킹 (5) - 오제누마 호수 한 바퀴 (2) | 2023.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