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로이 트레킹을 하는 날이다.
조식 자리에서 19km 걸을 걱정으로 잠을 못 잤다는 내 말에 잘 먹고 잘 자서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실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난이도를 모르니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
하늘이 파랗고 흰구름이 높게 떠 있어 상쾌한 아침이다.
오전 8시 15분 여성 가이드를 따라 트레킹을 시작한다.
호텔 앞에서 완전히 중무장을 한 서양 트레커들을 보면서 엄청나게 추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날씨는 포근하다.
후추이 쿠스코 트레킹을 할 때 겪었던 것처럼 언제 변할지 모르는게 큰 산 날씨이기는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 비교적 완만한 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 트레킹을 할 때 두 번쯤 급경사가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을 하고는 앞장서 걷는다.
몸집도 자그마하고 별로 말도 없는 가이드는 무표정하게 일정한 속도로 걷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다.
가이드 뒤를 따라가려니 바쁘군.
가다가 누가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물으니 사방이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이라고 말한다.
다만 멀리 가서 일을 보라고.
여성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더 멀리 가라고 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아무 말도 없이 평탄한 길을 따라 걷는데도 일행이 두 팀으로 나누어지다시피 했다.
가이드 보고 좀 천천히 가자고 해도 생각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자기 속도가 그렇겠지.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은 속도에 불만이 많다.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겨우 와서 쉴까 싶으면 다시 출발을 하니까 좀 약이 오르는가 보다.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뾰족한 巖峰이 솜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눈에 덮여 있다.
쎄레토레와 피츠로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포인트이다.
장엄한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모두 분주하네.
암봉을 보면서 짝꿍이 가이드에게 피츠로이에 올라가 봤느냐 물으니 전문산악인만 가능하다고 한다.
자기는 못 가 보았다고 하면서.
저 봉우리를 오르려면 빙벽을 올라갈 능력이 되어야 하겠지.
쎄레토레 산군을 보여주는 안내판 앞에서 잠시 쉰다.
우리에게 안내판을 보며 설명하던 가이드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리고 한참 동안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거꾸로 우리가 가이드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네.
길은 특별히 험할 것 없이 약한 경사가 이어진다.
거의 흙길이니 발도 편하다.
키 작은 나무들이 도열한 길을 따라 걷다가 돌들이 발길을 훼방하는 길을 만나고, 빙하 녹은 물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는 길을 따라 걷고...
트레킹이 생각보다 수월해 마음이 느긋해졌다.
쉬엄쉬엄 걸어도 되겠구나.
가이드를 따라 걷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래?
누가 판소리 한 소절을 부르고 있지 않나.
가만히 들으니 친구 목소리다.
이건 아닌데...
자연에 오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기본 아닌가.
그리고 자연에 있는 다른 동식물이 놀라지 않도록 목소리도 줄여 말해야 하는데 하루, 이틀 산에 다닌 것도 아닌 사람이 왜 그러지?
자연에 오면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손님일 뿐이다.
판소리에 이에 대중가요까지 소리 높여 신나게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좀 불편했다.
외국인이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연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남의 나라에 와서 이게 무슨 일이람.
가이드는 이런 상황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어제 가이드 같으면 진작 한 마디 했을텐데...
이번 가이드는 엘 칼라파테에서 만난 가이드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지난 번 가이드는 키도 크고 시원스럽고 카리스마가 넘쳤던 반면 이번 가이드는 작고 내성적인데다 무표정해 보여 무슨 생각을 할까 싶을 정도이다.
조금 답답하기는 하다.
가는 길에는 나무들의 공동묘지라고 할 정도로 고사목이 많다.
흰빛의 고사목 무덤이 멀리서 언뜻 보면 계곡물처럼 보이겠는걸.
나무로 무슨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꺾이고, 쓰러지고, 겹쳐 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화재가 일어났을까?
금을 그어 놓은 것처럼 고사목이 하얗게 있는 곳은 화재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이런 나무들을 보니 안타깝다.
나무가 저절로 자라 복원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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