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 말에 따르면 우리는 오늘 라구나 또레에 가서 호수를 본 다음 내려온단다.
체력 좋은 재석씨는 가이드에게 먼저 가겠다고 하고는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졌다.
우리 목적지인 호수까지 가서 기다리겠지.
가이드가 처음에 경사가 심하다고 하던 길이 어디일까?
우리 기준으로는 경사가 급하다고 하면 정말 숨이 넘어갈 정도의 깎아지른 된비알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경사는 다른가 보네.
약간의 경사길이 있을 뿐 급경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정도라면 정말 부담없이 걸어도 되겠다.
부지런히 가이드를 따라가자 멀리 언덕 같은 것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저 너머에 호수가 있겠구나.
몇 년 전 중국 메리설산에서도 대여섯 시간 걸어 산정에 있는 호수까지 다녀오는 일정이 있었지.
거기는 해발고도가 높아 숨을 몰아쉬며 걸었는데 오늘은 무난하구만.
언덕을 오르자 발 아래 라구나 또레(호수)가 보이는데 기다렸다는 듯 찬바람이 우리를 공격한다.
모두 한쪽에서 겉옷을 껴입느라 분주하다.
사람을 날려버릴 것 같은 찬바람이다.
그래도 빙하수가 흘러든, 빙하가 둥둥 떠 있는 호수 배경으로 사진은 찍어야지.
그런데 호수 물빛이 탁하다.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일까?
금세라도 눈발이 날릴 것 같은 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춥기는 하겠지만 눈이 내린다면 눈으로 덮인 피츠로이를 보며 눈을 맞는 것도 추억 한 페이지를 더하는 게 되지 않을까.
강회장님은 조금이라도 더 올라갔다 온다고 반대편으로 올라가고 우리는 호수 가까이로 내려선다.
그런데 호숫가에 있어야 할 재석씨가 안 보인다.
아까 빨간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빨간 옷 입은 건장한 사람이 없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재석씨가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이지만 이 산중에서는 스마트폰이 작동되지 않고 스페인어도 모르니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재석씨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재석씨는 찬바람을 피해 돌무더기로 만든 '쉘터' 안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놀래 주려 하고 있었다.
장난꾸러기였네.
예끼, 이 사람아!
걱정을 사서 하는 짝꿍은 재석씨가 염려되어 심각하게 어두운 표정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러니 인솔자 기훈씨는 더 했겠지.
사진 몇 장 찍고 얼른 하산길로 접어든다.
많이 걸은데다 12시가 가까우니 배가 고프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하기는 이런 바람을 맞으며 무얼 먹으면 체하기 꼭 알맞겠지.
빙하가 녹은 물이 콸콸 소리내어 흐르는 계곡가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여행사에서 싸준 샌드위치와 음료수, 그리고 사과 한 알.
양이 많아 하나만 먹었지만 어제 먹은 샌드위치보다 훨씬 맛있다.
가이드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려니 가이드는 바로 사양을 한다.
가이드가 먹는 걸 보니 견과류 한 줌과 물뿐이네.
하루에 20km 걸으면서 먹는 것이 저 정도면 에너지가 부족하지 않을까?
견과류를 소리 없이 먹던 가이드가 다시 사라졌다.
아무래도 장이 불편한 모양이라고 우리끼리 한 마디씩 했다.
진짜 그렇다고 하면 오늘 굉장히 힘들었겠네.
본격적인 하산이다.
피츠로이 山群을 보며 걷는 길은 발길이 가볍다.
내려갈 때는 고사목 사진을 많이 찍었다.
올라올 때는 가이드 따라 걷느라 정신이 없었지.
마음이 가벼우니 누구 속도에 맞출 필요가 없어 내 속도대로 걸으며 사진을 찍고 룰루랄라 걷는다.
나중에는 앞만 보고 걸었다.
누가 앞서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나도 나름대로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니니 바로 호텔로 직행한다.
오후 3시 10분경 트레킹을 마쳤다.
점심 식사 포함해 7시간쯤 걸렸다.
거리를 생각하면 길이 평탄하다는 얘기겠지.
호텔에 들어가 씻고 빨래까지 싹 해 널었다.
개운하다.
그런데 여행 20일쯤 되니 빨랫비누도 닳아서 얇아지다 못해 부서진다.
이제 더 이상 빨래를 하지 말라는 듯.
이렇게 여행이 중반을 넘기니 남은 일정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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