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즐기며 정자에서 쉬다가 장기미 해변으로 내려갔다.
몽돌이 우리를 맞아 준다.
이 몽돌도 기가 세서 자석이 붙을 정도라고 했다.
정말인지 궁금하기는 한데 아무리 배낭 속을 머리로 뒤져도 자석으로 된 물건은 없다.
그렇구나 하고 다시 한번 돌을 쳐다본다.
근처에는 연못을 만들어놓고 그 주변에 예쁘게 돌을 쌓아 놓았다.
징검다리도 아닌데 그 돌 위를 폴짝폴짝 뛰며 걷는다.
연못 이름이 '선녀와 나무꾼'이란다.
이름에 얽힌 이야기야 뻔하지만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 재미있다.
연못 옆에서 위로 난 길을 따라가면 범바위로 오르는 용길인 모양이다.
길이 구불구불 용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오면서 희미하게 난 길을 보았는데 가파르게 이어져 길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우리는 용길이 아닌 길로 가야 하는데 이정표에는 용길밖에 없다.
조금 올라가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초행길에서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가는게 무모하게 여겨져 그만 후퇴하기로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니 한심하네.
그러다가 '쑥이'가 정 작가가 추천한 길이니 문자를 보내겠다고 한다.
문자를 보냈다는데 바로 회신이 없서 터덜터덜 오던 길을 되돌아 올라간다.
유난히 몸이 무겁다.
오르막길인데다 헛수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그렇겠지.
올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멀었나 싶기도 하네.
낑낑대며 올라가는데 연달아 경운기가 지나간다.
고민하다가 뒤에서 오시는 분께 '말탄바위'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으니 아예 말탄바위를 모른다고 하시네.
스마트폰 내비에 나오지도 않고 동네 어른도 모른다는 바위를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이렇게 헛발질도 하는 거지 하며 힘들여 걷고 있는데 후배 전화가 울렸다.
정 작가 전화라고 한다.
명품길을 못 찾고 되돌아가고 있다고 하니 연못에서 한참 올라가면 이정표와 갈림길이 나온단다.
연못 근처에 있는 이정표에는 갈림길 표시도 없고 말탄바위도 안 나와 있었으니 헤매는게 당연하지.
정 작가는 우리에게 오던 길을 또 되돌아가라고 한다.
아니 그럼 오늘 이 길을 세번이나 걷는게 되는데...
명품길이 얼마나 잘난 길인데 그러나 싶기도 하다.
그래 속는 셈치고 가 보자.
최악의 경우 목섬을 못 간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어이가 없지만 다시 장기미 해변을 거쳐 오르막길로 접어 들었다.
아까 보았던 이정표를 지나 얼마쯤 걸었을까?
정말 여기에는 이정표가 나오고 용길과 갈림길 표시가 잘 되어 있었다.
이전 이정표가 부실한 것이다.
물론 여기도 불친절하게 거리 표시나 시간 표시가 없기는 하다.
전체적으로 슬로길이나 다른 이정표가 잘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오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신경을 쓸 수는 없었을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림의 < 길 > 전문
어찌 되었든 이제 명품길로 접어들었다.
오르막길을 숨을 헐떡이며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있는데 아까 경운기를 몰고 가던 분들이 우리를 보고 무어라 소리를 친다.
잘 모르기는 해도 우리에게 그쪽으로 가면 말탄바위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우리가 물어 보았으니 사람들이 모여 말탄바위 이야기를 했겠지.
우리도 손을 흔들어 길을 찾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우리가 갈 길을 바라본다.
햇볕이 제법 강하다.
바람도 꽤 세게 분다.
자외선 차단제를 덧바르는 건 귀찮아 모자를 챙이 넓은 걸로 바꾸어쓰고 턱끈까지 조인다.
제대로 준비를 한 셈이니 슬슬 걸어볼까나.
후배 전화기가 울려 받으니 또 정 작가이다.
자신이 권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길을 찾았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서 중년 여인 둘이 잘 가고 있는지 책임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고맙네.
왼편으로 바다를 접한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오른편으로 가풀막진 산이 솟은 길이다.
사실 바로 발 아래가 바다이니 아슬아슬 긴장이 되기도 한다.
섬에 있는, 걷기 좋은 길이라 이름 붙은 대부분의 길이 그렇다.
금오도 비렁길도 그렇고, 남해 바래길도 그렇고, 여수 돌산도 갯가길도 그랬지.
조심스럽게 바다를 내려다보며 걷는다.
간혹 진달래가 피어 있고 자잘한 꽃들도 막 얼굴을 내밀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가운 걸까.
'쑥이'는 힘은 들지만 즐거운 것 같다.
가끔 작은 섬이 눈에 들어오고 낯선 새 소리만 귀에 들어오는 곳.
오롯이 우리 두 사람이 이 작은 산을 차지하고 있다고나 할까.
사람 한 명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호젓한 길을 걷는 맛도 특별하다.
앞을 보고 걷다가 순간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꽤 큰 뱀이 바로 옆에 지나가고 있었다.
격하게 우리를 환영하는군.
후다닥 뛰어 앞으로 내달리곤 한동안 정신이 없다.
그 새 도망갔는지 '쑥이'가 지날 때는 뱀이 안 보였단다.
다행이네.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다.
거리도, 소요시간도 모르고 무작정 걸으려니 조금씩 지루해질 무렵 눈 앞에 무슨 구조물이 나타났다.
바닷가에 저런 걸 설치한 이유가 뭘까?
궁금해 하며 걷는데 안내문이 보인다.
방목하는 염소들 때문에 만들었단다.
염소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구조물만 보이는데 예상 안 했다가 염소가 불쑥 나타나도 무척이나 놀라겠는걸.
뒤따르던 '쑥이'가 한참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 친구 다리가 안 좋다더니 걱정이 되네.
멈추어서서 '쑥이'를 기다린다.
스틱에 의지해 헉헉대며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탈이 난 것은 아닌지 물으니 다리는 아프지만 천천히 가면 될 것 같단다.
느린섬에서 천천히 걷는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빨라지는 내가 문제다.
1시간 가까이 걸었을까?
슬슬 배도 고프고 걷기도 싫어진다.
아침부터 범바위에 올라갔다 내려갔지 장기미 해변을 왔다갔다 했지...
이 근처에서 왔다갔다 했지만 꽤 걸은 셈이다.
범바위가 바로 위에 있으니 안내지도만 보면 거의 다 왔는데...
한나절이 넘게 범바위 근처를 헤매고 있으니 범바위 氣는 엄청나게 받았겠구만.
그래서 잘 버티고 있는 걸까?
오후 1시 50분, 걷다 보니 이정표가 보인다.
그토록 찾던 말탄바위가 바로 여기겠구나.
권덕리에서 올라와 여기에서 명품길과 용길로 갈라지는 것이다.
말탄바위에 다 왔다고 '쑥이'에게 기운 내라고 소리쳐 이른다.
'말탄바위'는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말안장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겠지.
말[言] 그대로 하면 말[馬]을 타고 있는 셈이겠군.
조금 지쳐서 쉬면서 '쑥이'에게 말한다.
정 작가한테 무사히 말탄바위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 주라고.
그 친구도 신경을 쓰고 있으리라.
우리가 별일 없이 잘 갔는지.
전화를 하면서 '쑥이'가 연신 웃어댄다.
정 작가가 반말을 하기에 자기도 같이 반말을 했더니만 돌아오는 말이
"반말 트지 말고요, 헉헉대지 말고요..."
두 사람이 똑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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