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청산도에서 봄과 놀다 (4)

솔뫼들 2018. 4. 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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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와서 집에서보다 더 일찍 일어난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 시간을 맞추어야 하고 도청항까지 나가는 차에 동승하려면 하는 수 없지.

오전 6시쯤 일어나 준비를 하고 옆 건물로 향한다.

상에는 벌써 정성스런 음식이 차려져 있다.

침술에 능하시다는 90대 어르신도 계셨네.

주인장 내외는 어르신을 모시기 위해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 청산도로 내려왔다고 하신다.

쉬운 일은 아닌데...



 오전 7시 30분 도청항으로 향한다.

아침을 먹은 후 숙소 주인장한테 들은 목적지를 떠올리며 청산 버스 시간을 알아 본다.

청산버스는 첫배가 들어와야 출발을 하니 근처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

바다 하면 떠오르는 등대도 있고, 청산도를 알리는 조각작품도 있고...


후배는 도청항 매표소 사무실에 앉아 쉬는데 그 옆에 청산도 펜션이나 민박 등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청산도에서는 '靑山休家'라는 이름으로 청산도 펜션이나 게스트하우스,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함께 홍보도 하고 활성화를 시킬 방안도 논의하고 있는 듯하다.

무려 100개 가까이 된다고 하니 작은섬 대부분의 가구에서 운영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

슬로시티 청산도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배가 들어왔다.

평일 첫배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버스에 오르니 나무로 만든 네모난 돈통이 보인다.

1000원짜리 지폐가 날아갈까 봐 돌로 꾹 눌러 놓았고.

주로 1000원짜리 지폐와 동전이 있는데 이런 광경을 보니 한참 이전 시대 같아 재미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현금이 거의 필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천원짜리 지폐와 동전을 세어가며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라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라고나 할까.


 거기에다가 첫차에 손님이 적다 보니 기사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범바위 이야기도 하고, 버스가 오가는 이야기도 하고.

덕분에 심심치 않게 버스를 타고 범바위 입구까지 갔다.



 버스에서 내려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걸으니 온갖 것을 다 가진 양 여유롭다.

날씨도 좋고, 자동차 소음도 들리지 않고, 이런저런 꽃이 반겨주어 화사하고.

정말 오랜만에 이런 기분이다.


 살짝 오르막길을 따라 걸으니 몸에 온기가 배어난다.

왼편으로는 층층이 만들어진 밭이 보이고 거기에는 마늘과 보리, 배추 등이 심겨 있다.

산에는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녹색을 찾아보기 힘들어 밭에서 느껴지는 녹색이 더욱 싱그럽다고나 할까.



 장기미 해변과 범바위로 나뉘는 갈림길을 지났다.

가끔 관광객을 태운 차량이 지나가지만 이렇게 걷는 맛만 할까.

느린섬에 와서는 두 발이 가장 좋은 교통수단 아닌가.

길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에서는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꽃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한창 자태를 뽐내는 진달래 꽃빛은 선연하다.

걷다가 돌아보고 사진 한 장 찍고, 또 걷다가 돌아보고 꽃 구경 한번 하고.



 그렇게 걷다 보니 오전 8시 50분 범바위 주차장에 도착했다.

바로 산길로 오를까 하다가 편한 길로 가기로 했다.

길 한쪽에 범바위에 대한 전설이 적혀 있다.


옛날 옛적에 신선을 모시고 다니던 범이 있었다.
어느 날 신선이 범에게 말하기를 우주의 기운이 천지를 뒤덮고 천지물간에 생긴 기운은 모이고 넘쳐 복이 덕을 이루는 남쪽의 신성한 섬, 청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제 그 곳에 불로불사의 생명기운이 퍼지게 해야 한다면서 열 개의 영원한 생명들을 모으라고 말했다.

신선은 하늘을 비추는 해와 달, 해가 빚은 산, 산이 품은 물, 물질을 만드는 돌, 돌틈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 이 땅을 뛰어노니는 사슴, 하늘을 나는 학, 바다에서 시간을 품고 있는 거북과 마지막으로 뭇 생명들이 먹을 불로초를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범은 그 길로 열 생명을 만나 신선의 말을 전하고 불로불사의 생기가 넘치는 곳, 청산으로 가도록 권하였고 그 말을 들은 열 생명은 범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런데 범에게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명색이 12간지에 들어있는 자신이 빠졌다는 것에 못내 서운하고 화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범은 신선이 내린 명을 거역하고 그 중 하나인 사슴을 해치고 애기범과 청산으로 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선은 크게 노하여 범에게 이르기를 “달빛이 바다를 비추기 전에 떠나라. 만약 그 때가지 떠나지 않으면 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곳을 떠나기 싫었던 범은 애기범을 데리고 가는 길이 더뎌 달빛이 바다를 비추기 전에 떠나질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범의 모습을 한 바위는 바람이 불 때마다 커다란 소리를 토해내고 있는데 이것은 범의 울음소리라고 전해져 온다.
이를 증명하듯 지금도 청산에는 십장생 중 사슴만이 없다고 한다.
생명의 기운이 모이고 퍼지는 청산, 그 곳에는 이루지 못한 범의 슬픈 이야기가 바위로 우뚝 서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범바위는 형상이 달라 보인다.

범이 기지개를 펴는 모습 같기도 하고 웅크린 모습 같기도 하다.

범바위 주변은 기가 세다고 한다.

버뮤다 삼각지대나 아이언바텀처럼 기가 세어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바람에 선박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지역이라고.

그래서 氣를 받기 위해 범바위를 찾는 사람이 많단다.

평범한 나는 잘 모르겠지만 무속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찾을 만한 곳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범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나는 전망대쪽을 향하고 후배는 왔던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평일이라서인지 전망대 안 카페는 조용하다.

힐끗 쳐다보고 작은 범바위를 향해 오른다.

근처에 1년 후에 배달된다는 느린우체통이 있다.

한번도 이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내게 쓴 편지를 넣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손편지 쓰는 일이 드물어진 시대에 1년 전의 내 생각을 손편지로 만나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두 점 사이에 우린 있습니다
내가 엎드린 섬 하나와
당신이 지은 섬 하나
구불구불 먼 길 돌아 아득히 이어집니다
세상 밖 저쪽에서 당신은
안개 내음 봄 빛깔로 써보냅니다
잘 지냈어... 보고픈... 나만의...
그건 시작이 아니라 끝, 끝이며 또한 처음
맑은 흔적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혹시 압니까
온 세상 왕창 뒤집혀 마른 잎 다시 솟고
사람들 이마에 꽃잎 날릴 때
그 너울 사이사이
흰 빛 내릴 때
그쪽 섬에 내 편지 한 구절 깊숙이 스미고
이쪽 섬에 당신 편지 한 구절 높이 새겨져
혹시 압니까
눈물겨운 가락이 될지 섭리가 될지
아프게 그리운
한 흙이 될지

   정한용의 < 편지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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