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항에 도착해서는 시간이 좀 늦기는 했지만 여행에 참고할 자료를 찾는다고 도청항 매표소, 방문자센터 등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하나도 찾지 못 했다.
버스 시간도 알 수 없고 어디쯤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정보도 없다.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한 해 33만명이나 찾아 청산도가 가라앉을까 걱정이라더니만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준비가 덜 된 느낌이 든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청산도에서는 어떤 것도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라더니만 그 말이 꼭 맞네.
숙소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하고는 어쩌다 도청리까지 나왔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가는게 낫겠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 전화 통화로 저녁을 먹고 가겠다고 이르고 음식점을 찾는다.
미리 알아둔 정보를 이용해 늘푸른식당을 찾아가 생선구이 정식을 시켰다.
생선이 싱싱해 그렇기도 하겠지만 금세 구워 바삭바삭하고 노릇노릇한 생선이 입맛을 당기게 한다.
새벽에 집에서 나오느라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고, 고속버스에서 간식을 먹는 바람에 점심도 배 안에서 뒤늦게 김밥으로 때웠다.
당연히 저녁은 잘 챙겨 먹어야지.
생선구이도 맛있었지만 김장김치 맛이 기가 막히다.
김치를 한 그릇 더 시켜서 정신없이 먹었다.
숙소에 들어가 잠잘 일만 남았는데 너무 많이 먹은 것 아닌가 모르겠네.
교통편이 없어 숙소까지 걸어가야 하니 그 동안 소화가 되겠지 합리화를 해 본다.
근처 하나로마트에서 맥주 두 캔을 사서 들고 설렁설렁 걷는다.
가는 길에 눈에 띄는 카페가 있는데 商號가 '느루'이다.
이 단어는 어머니가 사용하시는 걸 많이 듣기는 했어도 직접 사용한 적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느낀 것이지만 어머니께서 어휘력이 아주 풍부하셨고 특히 토박이말을 적절하게 잘 쓰셨구나 싶다.
간판 상단에 '느루'의 뜻을 조그맣게 적어 놓았다.
'한꺼번에 몰아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갑자기 주인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고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쓰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말이 발전할텐데 외국어의 홍수에 떠밀리는 현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도청항에서 지리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슬로길로는 4km 정도 되었는데 차도를 따라 걸으면 거리가 짧아진다고 해도 30분 가까이 걸어야 하리라.
포근한 봄밤이기는 하지만 새벽부터 시작된 여행에 오후에 걸은 여파까지 있으니 걷는 것이 꾀가 나기는 한다.
뒤에서 따라오던 후배가 갑자기 지나가는 차를 잡자고 한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는 차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만류하는데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후배는 지나가는 모든 차를 보고 손을 흔드네.
2대쯤 차가 지나갔을까?
그런데 지나가던 차 한 대가 섰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하여 청산도 게스트하우스로 간다고 하니 얼른 타란다.
운이 좋게도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집에 사는 분이었다.
웬 횡재람.
숙소에 들어가 씻고 난 후 뜨끈뜨끈한 방에서 시원한 맥주 하나씩 들고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를 돌아보니 참으로 길었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 고속버스에, 배에, 두 발로 걷기까지 먼 길을 왔다.
오늘 숙소에 들기까지 운이 좋은 걸 보니 이번 여행 나머지 시간도 좋은 일만 있으리라.
지난 밤 긴장을 해서 수면 부족 상태인데도 금세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고 걷던 길을 떠올린다.
바다와 파도와 바람과 들꽃과...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자연 그대로, 그래서 더욱 풍성한 시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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