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을 차려 목섬 방향으로 접어든다.
가는 길에 소나무 한 그루가 멋드러지게 서 있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네.
어찌 보면 살짝 등이 굽은 할머니 같기도 하다.
이 나무가 '동촌리 할머니나무'라고 명명된 나무인가?
소나무 감상을 하고는 발길을 옮긴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정호승의 < 리기다 소나무> 전문
방파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신흥리 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변에 물이 빠지면 나타나는 모래섬을 풀등이라고 부른다는데
소박하고 예쁜 이름의 '풀등'이 언제쯤 보이는지 모르지만 말만 들어도 신기하다.
신흥리 해변은 무려 2km나 된단다.
꽤 넓고 깊다고 해야 하나?
옆으로뿐 아니라 안쪽 깊이까지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졌다.
보기만 해도 모래가 얼마나 부드러울지 짐작이 된다.
정말 드문 해변이네.
많은 모래사장이 인공구조물 때문에 모래가 씻겨나가는 등 수난을 겪고 있는데 이런 모래사장을 만나니 반갑고 고맙다고 해야 할까.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햇살이 제법 따갑다.
해변가 왼편에 정자를 지나니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햇볕 가릴 곳 하나 없는 곳을 타박타박 걷는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도 지루하네.
뒤에서 따라오는 '쑥이'도 재미없다는 표정이다.
억지로 걷는 것이 역력하게 보인다.
포장도로 걷는 것이 좋을 턱이 없지.
간간이 차가 지나가는데 이번에도 얻어 타고 가고 싶은 걸까?
마음을 바꿔 먹는다.
목섬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왕 가는 것 가서 실망을 한다 해도 그런 기대를 갖고 걸으면 좀 낫지 않을까.
목섬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도 여러 대 서 있고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
우리처럼 걷기 위해 온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쑥이'는 더 이상 못 걷겠단다.
그럼 여기에서 기다리라 하고 나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왔으면 가야겠지.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바닷가에 퍼질러 앉으면 무슨 재미래.
산길로 접어들었다.
숲이 우거져 길이 어두컴컴하게 느껴진다.
살짝 경사진 길을 부지런히 걸으니 등에 땀이 조르륵 흐른다.
한 바퀴 돌아오는데 1.9km라고 했지.
낯선 길을 혼자 걸으려니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게다가 후배는 혼자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핑계거리를 찾아 목섬삼거리에서 새목아지를 돌지 않고 바로 슬로길로 내려온다.
아열대성 낯선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짙은 길이다.
뛰다시피 걷는다.
얼마쯤 걸었는지 바닷가로 나왔다.
사실 제멋대로 생긴 돌이 있는 바닷가가 도리어 걷기 더 불편하다.
거기에 파도에 떠밀려온 어구들이 몹시 지저분하게 널려 있어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어제 지리해변 한쪽에서도 그런 풍경을 만났다.
심각한 문제이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터전인 바다와 갯가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바다는 금세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릴텐데...
게다가 슬로시티, 슬로길이라고 홍보하면서 그런 길에 이런 쓰레기가 쌓여 있는 걸 보면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는 말이겠지.
사람들이 많이 찾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 아닐까.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가 계단을 만났다.
다 내려왔다는 말이다.
부지런히 내려서서 후배 '쑥이'를 찾으니 한쪽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떡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지랖이 넓어도 바다만큼 넓구만.
쓸쓸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은 杞憂였다.
나를 보더니만 '쑥이'가 손짓해 부른다.
함께 있는 분들은 지역 주민인 모양인데 '쑥이'는 배가 고프다고 하며 넉살스럽게 아까 마을에서 본 장삿집 떡을 얻어 먹었단다.
아이고, 사막에 데려다 놓아도 굶어죽을 일 없겠네요.
얼떨결에 나까지 그 자리에 끼어 앉았다.
해산물을 채취하다가 심심해서 그 해산물 안주 삼아 소주 한 잔 기울이고 계셨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기보다 한참 젊은 여인네가 먼저 말을 붙이니 즐거웠겠지.
떡에, 과자에, 해산물까지 마구 퍼 주시네.
물론 후배도 어젯밤 먹다 남아 싸온 말린 생선포를 건넸다고 하고.
덕분에 돌미역도 얻고, 시커매서 징그러운 군소도 처음 먹어 보았다.
그런데 애써서 채취한 미역을 이렇게 얻어 가도 되나 모르겠네.
내가 극구 사양하자 '쑥이'는 지나친 사양도 도리어 성의를 무시하는 거라면서 덥석 받는다.
그래도 오늘 힘들여 채취한 걸 몽땅 받으려니 영 죄송한 마음이다.
잘 먹고 좋은 것까지 얻어서 목섬을 나온다.
돌미역 무게까지 더해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설렁설렁 걷는다.
오늘 할 일 완수했다.
아직 해는 산자락 끝에 걸쳐져 있는데 이제 숙소로 돌아가면 된다.
오늘 저녁은 숙소에서 먹는 수밖에 없겠군.
신흥리 해변에서 지리까지는 어쩔 수 없이 숙소 주인장께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를 해야 하고.
물이 더 빠진 신흥리 해변은 정말 매력적이다.
물이 빠지면서 모래가 만들어놓은 환상적인 무늬에 매혹되어 눈을 떼지 못 하겠다
해돋이가 일품인 해변이라지만 이 해변에 쭈그리고 앉아 해넘이를 바라보는 맛도 좋겠는걸.
이쪽이 동쪽이라 분위기만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동촌리에 도착했다.
마을 안쪽을 기웃거리다가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펜션인 것 같은데 굳게 잠겨진 문에 해바라기꽃 그림과 함께 이렇게 씌어 있다.
" 안녕?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펜션 숙박객을 위한 말이겠지만 발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종일 걸은 사람에게도 위로가 된다.
입에 저절로 미소가 머문다.
오후 5시 20분, 숙소 주인장한테 전화를 한 후 톳을 베고 나서 데리러 오겠다고 하는 대답을 듣고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하늘색 '꼬맹이차', 분명히 아까 탔던 차 맞는데...
불쑥 나타나 차창을 열고 타라고 하는 사람은 정 작가였다.
작가의 집에서 우리를 보고는 차편이 불편하겠구나 싶어서 왔다고.
덕분에 쉽게 갈 수는 있겠지만 아까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는데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나 모르겠네.
정 작가는 남은 구간을 차로 드라이브시켜 주면서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 준다.
남은 구간을 다음에 와서 걸어야지 생각했는데 가을이 좋겠구나 싶어지네.
가을에 단풍길이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이라는 국화리를 지나 금세 지리에 도착했다.
껄렁하게 말을 붙였던 완도항부터 우리 발길을 바꾼 명품길 추천에 권덕리까지 데리러 와 준 일,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마지막 배달(?) 서비스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를 해 주었군요.
언제 갚을지는 모르겠지만 청산도에서 좋은 추억을 만드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차를 얻어타고 간다고 숙소 주인장한테 다시 연락을 하니 '푸하하!' 웃으면서 엊저녁부터 오늘까지 능력있는 중년 여인들이라며 박장대소한다.
20대보다 낫다나.
50대는 겁이 없어져서 그런 것 아닐까?
해조류와 된장찌개로 이루어진 집밥을 먹고 뜨끈한 방에 누웠다.
얻어온 돌미역도 함께 누웠다.
조금이라도 말려야 무게를 줄이고 내일 갈 때까지 상하지 않는다면서.
'쑥이' 덕분이지만 정말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있구만.
서둘러 걷지 않았지만 오늘 걸은 거리가 20km가 넘는다.
명품길 찾는다고 장기미 해변을 왔다갔다 했지 느린섬 여행학교도 두 번이나 간 셈이지...
오늘 찍은 사진을 돌려보면서 피식 웃는다.
다리가 뻐근하고 물집 잡힌 발가락이 쓰리다.
오늘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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