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권덕리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산길에서 벗어나니 순한 시골길이 이어진다.
산자락에 납작 엎드린 마을, 층층이 이어진 밭자락, 정겹게 돌림자로 이름을 지은 개집도 나란히 있고...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풍경이 이어진다.
권덕리에서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마을 노인정이 있는 곳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나 버스 시간을 여쭈어 보니 동네가 공사중이라 버스가 안 들어온단다.
그럼 어쩐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정 작가한테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런 정보를 다 알면서도 우리에게 명품길을 추천했으니 책임이 있다면서 '쑥이'를 통해 정 작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번에는 존대말로 전화를 하니 하던 대로 하라고 한다며 '쑥이'는 또 쿡쿡 웃는다.
정 작가를 기다리는 동안 노인정에서 빈 물병을 채운다.
여기는 섬인데도 불구하고 수질이 참 좋다.
어젯밤 씻을 때도 물이 좋다 느꼈는데 물맛도 아주 깔끔하고 개운하다.
작은 섬인데도 산이 많아 그렇지 않을까.
어디나 나무가 많아야 공기도, 물도 좋다는 말이겠지.
이런 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되었다는 곳에서 잠시 쉼표를 찍는다.
정 작가가 작은 전기차를 통통거리며 달려왔다.
고마운지고.
차는 마을을 벗어나 아침에 버스를 타고 지난 길을 달린다.
그 와중에 정 작가는 지나는 길목에 있는 지명과 전설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준다.
그러면서 자기가 펴낸 책에 그런 이야기가 다 실려 있다고 하네.
궁금하니 꼭 찾아 읽어 보아야겠다.
정 작가가 우리 나이를 알고 나서는 말투가 달라졌다.
그 친구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자기보다 나이가 적다고 생각을 했을까?
차가 다시 느린섬 여행학교로 들어간다.
식당에서 무얼 먹을 수 있는지 물으니 주방에 아무도 없단다.
평일에는 찾는 사람이 없으니 영업을 안 하는 모양이군.
그러더니만 점심을 못 먹은 우리를 위해 라면 운운 하는데 찾아 보니 라면도 없다네.
오늘은 어차피 점심을 못 찾아먹을 운수였나 보다.
그래도 다시 방문했으니 구석구석 살펴 보아야지.
건물 앞 화단에는 할미꽃이 피어 있고, '느림의 '종이라 이름 붙은 종도 한쪽에 경쾌하게 매달려 있다.
건물 복도에는 청산도에서 많이 나는 특산물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고.
정 작가는 오전에도 그랬지만 목섬보다는 뒤편 산이 낫다고 본격적인 산행을 추천한다.
'쑥이'에게 물으니 자기는 더 이상 걷는 것은 사양하겠다네.
더구나 산은 경사가 있으니 더 힘들거라면서.
결국 다음 목적지로는 아침에 계획한 대로 목섬으로 가기로 했다.
정 작가에게 희한한 인연에 고마움을 표하고는 다음 목적지인 목섬으로 가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
차도를 벗어나 슬로길로 접어든다.
개천 둑방을 따라가는 길이다.
개천에는 갈대가 아직도 누런 물결로 바람 따라 흔들리고, 그 곁에 흑염소 몇 마리가 '메에' 소리를 내며 우리 갈 길을 방해한다.
자기들 공간에 침범했다고 항의라도 하는 게지.
염소가 생각보다 고집이 세다 했던가.
우리를 보고 펄펄 뛰다가 한 녀석을 묶어 놓은 끈이 풀어졌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겠지만 녀석 성질 한번 대단하군.
이 길이 슬로길 7코스이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 가지런히 쌓은 돌담이 보인다.
저기가 상서리 명품마을인가 보네.
청산도 마을 전체가 거의 돌담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상서리 옛담장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새삼스레 눈길을 주게 된다.
오후 3시 15분, 신흥리 해변에 도착했다.
TV프로그램 '1박2일'을 찍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한때 '1박2일'팀이 다녀가면 순식간에 관광지로 변한다고 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오늘 여기는 우리들뿐이다.
우리가 가야 할 목섬으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며 잠깐 쉬기로 했다.
점심도 못 먹고 내리 걸어다녀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렇다고 딱히 않아서 쉴 만한 공간도 눈에 띄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다리가 고생을 할 수밖에.
도보여행을 계획했으니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이 들기는 한다.
노는 것도 체력전인게 확실하다.
도로 건너편 건물이 다른 건물들과 좀 달라보인다.
카메라로 당겨 보니 '느린섬 작가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정 작가가 말한 곳인가 보다.
작가로 등록이 되어 있으면 숙박비를 50% 할인해 준다고 했지.
이런 곳에 머물며 작품 구상을 하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시가 되지 않은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너를 버리는
배신의 아름다움,
인생이란 한 줄의 시,
버리는 것이 많아야 오히려 충만해지고
완전한 슬픔에 이르기 위해선 그 슬픔
괄호 안에 묶어야 한다.
행간을 건너뛰는
두 개의 콤마,
사랑과 이별의 줄넘기, 그러나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늘도 이별의 길목에서 돌아온 나는
원고지를 구겨
휴지통에 버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한 줄의 시.
오세영의 < 한 줄의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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