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슬로길 1코스 끝이자 2코스 시작점이다.
2코스는 '사랑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좋은 사람과 함께 걸으면 즐거움이 배가 되는 길이라는데 좋은 사람과는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곳을 청산도 사람들은 연애하기 좋은 길이라 여긴 모양이다.
그리 길지 않은 산길이 이어진다.
때로는 순하고 때로는 성깔있어 보이기도 하는 길.
잠깐이기는 하지만 오르막길에서는 숨을 몰아쉬고 허리를 펴지 못 한다.
본격적인 산행도 아닌데 날씨가 포근해서인지 땀이 줄줄 흐르네.
오르막길 중간에 털썩 주저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풍경 구경을 한다.
한쪽으로는 깎아지른 바위가 위협적이고 반대편으로는 무심한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
멀리 청산도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내가 살던 곳의 일은 까마득히 잊는다.
그게 여행의 좋은점이겠지.
여행 와서까지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하면 여행의 의미가 무엇이 있겠는가.
스마트폰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자연의 소리나 사람들 사는 모습에 귀 기울이고 눈 반짝이는게 진정한 여행 아닐까.
거기에 내 마음 속의 소리에도 귀를 여는 시간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무심히 발길을 옮기다가 또 깜짝 놀랐다.
어제도 그러더니만 왜 뱀은 나만 보면 그리 좋다고 나온대?
앞에서 가니 먼저 발견하는 것이겠지만 전에 산행 중에도 그랬었지.
뱀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정신을 차리고 걷다 보니 이 길 역시 돌아서 1코스가 보이는 지점에 가게 된다.
아래로 내려가면 도청항에서 멀어지니 우리는 다시 1코스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아주 빼어나군.
1코스에는 주말이라 수시로 들어오는 배가 쏟아내는 사람들로 여전히 붐빈다.
한가로운 발길을 옮기며 그들 사이로 다시 섞인다.
같은 길도 반대로 걸어가니 또다른 느낌이다.
산행에서 같은 코스라 해도 올라갈 때 느낌 다르고 내려갈 때 느낌 다른 것처럼.
잠깐 사이에 벚꽃은 더 흐드러진 것 같고 유채꽃 향기도 진해진 것 같다.
분위기에 젖어드는 여유가 생겼음일까.
천천히 분위기를 즐기면서 걷는다.
걷다 보니 출출해졌다.
아침을 일찍 먹었기 때문인가 보다.
청산도 여행 전에 찾아보았던 청산도 유일의 빵집이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빵집을 찾아가니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 명물이라는 미역카스테라는 오전 10시 좀 넘어 다 떨어졌단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빵을 고르고 유자차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이 눈에 띈다.
근사한 분위기의 카페는 아니지만 이것도 괜찮은걸.
우리가 골라온 빵도 생각보다 맛있어 자꾸 손길이 간다.
이래서 여기가 명소가 되었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빵과 커피를 사서 들고 가는 바람에 실내 자리에 앉아서도 그리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하기는 바닷가에서 바람을 쐬며 빵과 커피를 함께 해도 아주 멋진 소풍이 되리라.
아니면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뱃전에서 그래도 좋겠지.
아무튼 유일하다는 건 그만큼 가치를 더해주는 것 아닌가.
오전 10시 45분, 기분좋게 빵집에서 나왔다.
고속버스 시간을 오후 3시로 당겼으니 오후 1시 배로 나가기로 했는데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바로 빵집 뒤 산성에 올라가 우리가 걸었던 길을 바라본다.
이 산성 이름은 청산진성.
조선 고종 때 축조되었다가 흔적만 남은 걸 2010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슬로길 3코스였네.
시간에 쫓기며 3코스를 걸을 건 아니고 여유있게 산성에 앉아 느림을 만끽하고 있다.
우리가 앉아서 봄 햇살을 즐기는 걸 본 사람들이 몇몇 우리를 따라 산성에 올라온다.
우리 모습이 부러워 보였나 보네.
나지막한 산성을 따라 걷는 길도 또다른 풍경을 숨겨 있고 있겠구나.
다음에 오게 되면 정말 여유있게 쉬엄쉬엄 슬로길을 모두 찾아 걷고, 청산도의 산에도 다 발자국을 찍고 싶다.
20여분 쉬면서 놀다가 몸을 일으킨다.
휘날리는 벚꽃길이 기다린다.
연분홍 벚꽃에 연분홍빛 건물에 마음까지 연분홍이 되어 둥둥 떠내려가는 느낌이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올라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말에는 평일보다 배 운행횟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더니 배가 들어올 때마다 떼로 사람들이 몰리고 대형버스까지 줄지어 들어온다.
그나마 오늘은 3월의 마지막날 토요일이니 그렇지 내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으리라.
게다가 4월부터 5월에 걸쳐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가 열리니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인가.
만개한 꽃과 즐기지는 못 했지만 조금 일찍 와서 호젓하게 청산도를 만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싶다.
짧은 시간에 몰렸던 사람들은 다시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청산도에서 머물면서 느림을 몸으로 느끼는게 아니라 정말 ' 한 나절 관광객'인 것이다.
오가면서 보면 엄청나게 많은 숙박업소가 있는데 이런 데가 다 영업이 될까 걱정된다.
사람들을 청산도에 머물게 하는 어떤 묘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수욕장이 많으니 여름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는데 여름에는 도리어 한적하고 봄과 가을 축제기간에만 잠깐 사람들이 몰린단다.
곳곳에 느린섬을 알리는 달팽이 모양을 보면서 걷는다.
슬로시티 상징물이 달팽이였었지.
전에 증도에 갔을 때에도 본 것 같다.
증도는 다리가 놓이면서 느린섬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다.
청산도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정말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쉼표 역할을 하는 섬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곁에 이런 곳이 한곳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도청항에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하는 건어물 가게에서 짐을 찾고 근처 의자에 앉아 짐을 꾸린다.
어제 얻은 '돌미역', 그리고 숙소 주인장이 준 '톳', 거기에 처음 먹어보고 궁금해서 산 '몰'이란 해초까지 짐이 늘었다.
꾸역꾸역 짐을 배낭에 쑤셔 넣고 오늘도 애매하게 먹은 간식 때문에 점심을 먹기는 틀렸으니 배낭 속의 간식과 커피로 다시 배를 채운다.
어쩌다 보니 청산도 하면 끼니를 대충 때운 섬으로 기억되겠군.
이틀 편히 묵은 숙소 주인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배에 오른다.
올 때는 배에 손님이 적어 널찍한 곳에서 편히 왔는데 나갈 때는 발 디딜 틈도 별로 없다.
한 귀퉁이에 기대어 눈을 감아 본다.
사흘간의 쉼표를 나는 제대로 찍었나?
쉼표의 섬, 청산도가 멀어져간다.
사는 일이 그냥
숨 쉬는 일이라는
이 낡은
생각의 역사(驛舍)에
방금 도착했다
평생이 걸렸다
이화은의 <여행에 대한 짧은 보고서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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