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면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살아가면서 존경할 만한 스승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다. 나에게는 지금까지 생각나는 몇 분의 선생님이 계시다. 물론 지금 연락이 안 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가끔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도 살면서 큰 힘이 된다.
나는 비평준화된 소도시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3학년 말이 되면 고입 원서를 쓰느라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학생의 성적과 맞는 학교, 또는 학생이 원하는 학교와 학교에서 권하는 학교...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영어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으셨다. 아이들은 3학년 말이 되다 보니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산만한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시지 않자 몇몇 아이들은 장난으로 그리 춥지도 않은데 종이 쪼가리를 난로에 집어 넣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난로 주변에 웅기중기 모여 떠들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들어오셔서는 다짜고짜 누가 불을 피웠느냐고 물어보셨다. 아이들은 우물쭈물거리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화를 내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눌려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불을 피운 사람 일어나라고, 그렇지 않으면 반 전체가 기합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친구들은 누가 불을 피웠는지 다 알지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당사자는 장난꾸러기이긴 하지만 평소 학생 편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시던 선생님과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했는데도 선생님 표정에 기가 죽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선생님은 더 화를 내셨다. 아무래도 누군가 일어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눌려 내가 일어나서 제가 그랬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다른 친구 두 명도 덩달아 일어나서 자기들도 함께 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나오라고 하시고는 불같이 화를 내시며 마구 때리셨다. 그리고는 선생님을 속이는 것은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소리를 치셨다. 그 다음 제자리에 들어간 우리를 포함해 반 전체가 단체로 기합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가시면서 선생님은 자진해서 불을 피웠노라고 한 우리에게 반성문을 써서 교무실로 가져오라고 하셨다. 참 난감했다.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는 반성문을 어떻게 써야 하나? 결국 고의로 선생님을 속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잘못 했다고 몇 줄 써서 쭈뼛거리며 교무실로 들어가서는 얼른 선생님 책상 위에 놓고 나왔다.
방과 후 영어 선생님께서 부르신다기에 교무실로 내려갔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선생님과 말씀 도중 허허 웃고 계셨다. 어떻든간에 나는 조금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 화내시던 모습은 어디 가고... 선생님은 나를 보시고는 무슨 잘못을 그리 했느냐고 도리어 물어 보셨다. 그 다음 자신이 원서 문제로 찾아온 학부형과 의견 충돌이 심해 화가 났었노라고, 아까 맞은데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보셨다. 그 말씀에 속상하던 기분은 말끔히 풀렸다.
영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우리가 공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학교에 남아 공부한다고 학교를 배회하던 어느 날 선생님은 퇴근 후 한참이 지난 시간인데 운동장을 휘적휘적 가로질러 校舍로 오셨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 들어가 불도 안 켜고 악보도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 대셨다. 한참 호기심 많은 사춘기 여학생들은 문틈으로 엿보며 선생님께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숨죽이며 듣고 있었다. 무슨 곡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전공이 아니면서 그렇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멋쟁이 총각 선생님이 아이들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우상이었으리라.
가끔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생님이 바로 그 선생님이시다. 우리가 학교를 졸업할 때 서울로 전근을 가셨는데 대학에 가면 찾아 뵈어야지 하다가 시간만 흘렀고 이렇게 추억 한 갈피로 뒤적이기만 한다. 지금쯤 회갑을 넘기셨을테고 현직에서도 물러나셨을 것이다. 어디선가 멋지게 서리가 내린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어오실 것만 같다. 참 뵙고 싶다. 이제야 생각이 났느냐고 웃음 띤 표정의 야단이라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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