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다른 친구들 부모님에 비하면 비교적 여기저기 많이 다니신 편이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란 것이 어디 그런가. 오늘도 점심 식사를 끝내고
예술의 전당에 들렀다 가자고 하니 많이 가 본 곳을 무엇 하러 가느냐고 하신다. 마음만 앞서지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끝에서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건강이 돈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못 한 것을 어찌 하랴.
어머니께서 시골집으로 내려가시고 나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나는 아버지 살아계실 때 한번도 선물을 해드린 기억이 없다. 아니 해 드리지 못 했다.
그 당시 시골집에서는 버스로 한참을 나가야 시내에 갈 수 있었고 동네에는 구멍가게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시골 아이들에게 무슨 용돈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 세 끼 밥 먹고 걸어서 20~30분 정도 걸리는 학교에 오락가락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어찌 해서 돈을 조금 모은다고 해도 선물을 사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까막눈 수준이었고 그럴 엄두 자체를 내지 못 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러고 나니 엄마의 존재가 더욱 커다랗게 다가왔고 어머니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찍부터 생각이 많은 소녀로 자랐다. 그래서 중학교 들어간 후부터는 교통비 받은 것을 아끼느라 걸어다니고 공책을 빈틈없이 채우고 쓰고 남은 공책을 묶어 새 공책을 만들어 쓰는 등 조금씩 돈을 모아 어머니 선물을 사 드리기 시작했다. 중학교는 읍내에 있고 그런 면에서 활동 반경이 넓어진 것도 한 몫 했다. 일찍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어머니 선물을 사면서 언젠가부터 아버지 선물을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중후한 신사복을 보아도, 멋진 코트를 보아도, 세련된 야외복을 보아도, 근사한 중절모를 보아도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나도 그런 것을 사드릴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나름대로 자식들 잘 커서 사회에서 제 몫을 잘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버지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힘들 때는 "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잘 살고 있을 때는 " 그래 잘 됐어.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그래요. 세상에 아버지 같은 사람 없다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근동 사람 다 모여 하던 이야기 어린 저였지만 지금도 기억해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아버지 몫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도와주시는게 저희 돌보아 주시는 거라는 것 아시죠? 오랜만에 아버지 생각하며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이보다 더 나이 먹은 딸이 눈물을 흘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