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겨울 덕유산에서 (2)

솔뫼들 2022. 2. 1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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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2시 30분, 드디어 향적봉에 올랐습니다.
향적봉 주변은 인산인해네요.
향적봉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수십 미터 줄을 섰습니다.
저야 여러 번 왔으니 상관없지만 친구는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은데 대책이 없네요.
시간을 그렇게 보내기에는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향적봉(해발 1,614m)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서 대충 사진을 찍고 설천봉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여기도 줄이 길게 늘어섰습니다.
곤돌라를 타기 위한 줄이 향적봉까지 이어진 거네요.
최소 1시간 이상 기다려야 곤돌라를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와 의논을 하니 줄서서 기다리는 것도 쉽지 않고,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서도 무주리조트에서 30분 가량 걸어내려가야 하니 차라리 백련사 방향으로 걸어서 하산을 하자고 하더군요.
쉽지 않은 거리입니다.

 


 그래도 얼른 백련사 방향 하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산이 높아 그런지 벌써 해가 설핏해진 느낌이 듭니다.
이 코스는 하산이라고 해도 급경사라 만만치 않습니다.
더구나 눈길이 많더군요.
얼음길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며 스틱을 잡은 팔에 힘을 줍니다.
때로는 줄에 매달리고, 때로 나무에 사정을 하며 안고 돌기도 하고요.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방법이 없습니다.

 가다가 뒤돌아보니 친구가 안 보입니다.
이렇게 큰 산에서 겨울 산행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운가 봅니다.
한참 친구를 기다렸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아이젠을 하겠다고 합니다.

산에서는 늘 하산이 더 위험하지요.

 

 

 내려가는 사람과 올라오는 사람이 엇갈립니다.

이 시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언제 내려갈까 공연히 걱정이 됩니다.

이미 오후 시간인데 말입니다.

스키 시즌이라 무주리조트 곤돌라는 야간 운행도 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한참 달리다시피 내려갔습니다.

마음이 바쁘니 몸이 저절로 빨리 움직이네요.

가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친구 기다리고, 친구 모습이 보이면 또 내려가고...

외길이라 그나마 걱정이 덜 됩니다.

 

 얼마쯤 내려갔을까요?

이제 산길에서 눈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백련사까지만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될테니까요.

 

 

 친구를 기다리며 한숨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목들 사이로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하! 겨우살이로군요.

여기는 유난히 겨우살이가 많이 보입니다.

어떤 나무에 기생하는 건가 싶은데 잎을 떨군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잘 모르겠네요.

한때 겨우살이가 암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여 수난을 겪기도 했었지요.

높은 나무에 매달린 겨우살이가 더 효험이 있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습니다.

겨우살이가 주변에 많은 걸 보니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찾기 어려웠나 봅니다.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백련사 지붕이 내려다보입니다.

휴! 이제 안도의 숨이 나옵니다.

오후 3시 45분, 백련사에 도착했네요.

전에 와 보기는 했지만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포장도로라 조금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도 주차장까지 거리가 6km 가까이 되는군요.

몸이 천근만근이니 편한 길이어도 그리 만만치 않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제 다리로 걸어야지 별 수가 있겠습니까.

 

 계곡가 어사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은 걷기 좋게 생태매트를 깔아 놓아 다리에는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산길이니 꼬불꼬불하고 거리가 더 길군요.

어차피 경치 구경할 여유가 없으니 빠른 길로 가야지요.

 

 

 1km 정도 걸은 후 다리를 건너 포장도로로 나갑니다.

이제는 친구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두 사람 다 80년대 이곳에 왔었군요.

희한한 인연입니다.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 무주 구천동 계곡에 친구들과 휴가를 왔습니다.

그때 계곡에서 놀다가 싫증이 나서 등산화도 없이 향적봉에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꽤 가파른 길이었을텐데 힘들었다는 생각보다는 정상까지 올라가서 기분이 좋았다는 생각만 남아 있습니다.

잠자리가 참 많았던 기억도 나네요.

고도가 높은 산에서는 천적이 없어서 잠자리가 많다고 하지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세월이 우리 등을 떠밀어버린 것 같아 조금은 쓸쓸해집니다.

 

 

 송어 양식장도 지나고 덕유산 탐방안내소도 지납니다.

이제는 정말 음식점들이 즐비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생각보다 번화하군요.

육십령에서 백련사까지 덕유산 종주를 할 때 이곳을 지나갔는데 10여년이 훨씬 지났지만 이런 기억은 없군요.

하기는 요즘은 5년도 되기 전에 강산이 변하기는 하지요.

 

 오후 5시 10분,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하산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물론 향적봉에서 주차장까지 9km 가량 되는 거리이기는 하지요.

타고온 버스를 찾아보니 버스 안에 한 명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늦은게 아니었군요.

 

 

 잠깐이라도 요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주차장 한 켠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 남아 있던 떡과 귤을 부지런히 입에 밀어넣습니다.

7시간 산행을 하는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김밥과 귤 몇 개였으니 허기가 지기도 하지요.

게다가 아무래도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기에는 시간에 쫓길 것 같고, 귀가를 하면 시간이 너무 늦을테고요.

 

 본의 아니게 겨울 덕유산에서 18km 7시간을 앞만 보고 달린 날이었습니다.

겨울 산은 눈 때문에 체력 소모가 훨씬 많은데 말이지요.

힘은 들었지만 무사히 하산을 하고 나니 뿌듯하기도 하네요.

내일 스틱을 잡은 팔과 힘주어 걸은 다리가 좀 쑤시겠지만 몸살만 나지 않는다면 체력 테스트 확실하게 한 셈입니다.

앞으로도 산에 잘 다닐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나 할까요.

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