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겨울 덕유산에서 (1)

솔뫼들 2022. 2. 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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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큰 산에 다녀왔습니다.
새벽 5시 30분에 집에서 나가 밤 9시 30분에 집에 들어오기까지 하루가 참으로 길게 느껴졌지요.

 안내산악회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눈이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물론 햇살이 잘 비치는 곳이기는 했지만요.
얼마 전 호남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소식에 산이 온통 눈에 파묻혀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창밖 풍경을 보면서 설산 산행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되겠다 생각했지요.

 


 오전 10시 덕유산 안성탐방안내센터에서 출발했습니다.
본래 계획은 향적봉까지 올랐다가 곤돌라를 이용해 무주리조트로 내려오는 것.
그래도 5시간 산행은 되거든요.
겨울 산행은 위험요소가 많고 체력 소모가 심하니 그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지요.

 초반에 너무 서둘러 걸었나 봅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더군요.
날씨가 예상보다 푹하기는 했지만요.
계속 오르막길인데 '오버페이스'를 했다고 친구가 투덜거리더군요.
혹시나 용궐산에서처럼 제가 민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네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의지를 불태워 봅니다.

 칠연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근래 가물어 칠연폭포 장관은 기대하기 어렵겠군요.
왕복 600m 오가기가 귀찮아 포기하고 내처 오릅니다.

 


 얼마쯤 올랐을까요?
등산로가 온통 비계덩어리같은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 나오자 모두들 속도가 느려지고 아이젠을 착용하느라 바쁩니다.
일단 우리는 그냥 가기로 합니다.
발에 쇳덩이를 매달고 가는게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저는 가능하면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거든요.
대신 스틱을 이용해 중심을 잡곤 하지요.

 동엽령 오르는 중간쯤 가니 산길에 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큰 산은 아무래도 다르지요.
새삼스럽게 긴장이 됩니다.

 


 2시간 걸려 동엽령에 도착했습니다.
덕유산 종주할 때 쉬면서 점심을 먹던 전망대 데크에는 벌써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일단 우리는 30분 정도 더 가다가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다음 목표는 백암봉입니다.
아무래도 높은 산이니 주능선에 섰는데도 계속 올라가야 하네요.
친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다가 오른편 양지바른 곳에 바람을 피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겨울산에서 바람은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아 가지요.
조심해야 합니다.

 자리를 펴고 죽암휴게소에서 산, 무려 6000원이나 하는 비싼 김밥을 꺼냈습니다.
샌드위치를 사려다가 없어서 김밥을 샀는데 그래도 값어치를 하네요.

양도 많고 내용물도 충실하고요.
휴게소라고는 하지만 너무 비싸다고 투덜거렸거든요.
양이 부족할 것 같아서 산 도넛과 떡은 그대로 두고 차 한잔으로 마무리한 후 몸을 일으켭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거든요.

 


 오후 1시 25분, 백암봉에 도착했습니다.
해발 1500m 정도 되는군요.
사람들이 많아 얼른 이정표 사진 한 장 찍고 중봉으로 향합니다.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입니다.
몇 년 전 향적봉에서 남덕유 방향으로 푹푹 쌓인 눈을 헤치고 종주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친구가 뒤에 처진다 생각했더니 발에 쥐가 나려고 한답니다.
쥐가 나면 난감하지요.
발을 주물러줄까 친구에게 물으니 괜찮다고, 천천히 걷는다고 하네요.
주루룩 내려갔다가 다시 꺼이꺼이 올라가는 산길...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때로는 욕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힘이 듭니다.
사서 사는 고생이니 이것도 즐겨야지요.

 


 눈길 위에서 좋아라 하다가 앞사람이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는 모습에 식겁하기도 하고, 멀리 운해를 보며 감탄을 하기도 합니다.
끝없어 보이는 계단길 중간에서 숨을 헐떡이며 잠시 제 체력에 절망하기도 하고요.
예상보다 눈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덮인 산길이 여기가 겨울 덕유산이라고 말해주는 듯 하네요.

 힘겹게 중봉에 도착했습니다.
동엽령에서 향적봉까지 가는 중간쯤 되겠군요.
멋진 자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여유가 살짝 부럽기는 한데 역시 바로 통과.
이제 정상을 향해 걷는 길입니다.

 


 친구에게 기운 내라고, 중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에는 주목 고사목이 운치를 더해주는  
근사한 풍경이 있다고 얘기해 줍니다.
한동안 교목들 없이 철쭉이나 원추리 등 낮은키 식물들이 있던 공간에 색다른 나무들이 맞아주니까요.
그런데 친구는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냥 거리를 줄이는데만 관심이 있군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대로 주목 고사목은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지나가는 산꾼들에게 멋을 선사합니다.
몇번씩 와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아니면 갈길이 바빠 그런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쳐서 그런지  사진을 찍는 사람이 거의 없네요.
여유를 잊어버린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향적봉은 꽤 멉니다.

동엽령에서 향적봉까지 4km가 넘으니 산에서는 꽤 먼 거리이지요.
향적봉 주변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 중에는 산꾼도, 곤돌라를 이용해 설천봉으로 오른 관광객도 있겠지요.
아무튼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뒤에서 계단을 오르던 친구가 피식 웃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반대편으로 가던 산꾼이 내려가는 것도 힘들다고 하더랍니다.
그렇겠지요.
백련사 코스로 올랐을 것 같은데 지금쯤 당연히 힘이 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