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 치어 이리저리 헤매다 우리가 가야 할 길로 접어들었다.
어디에서 쉬면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하고 바위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아뿔사! 더워서 목에 둘렀던 버프를 벗어 팔에 끼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사라졌다.
사진을 찍는 동안 팔에서 빠진 모양이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친구의 권유에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 두리번거리니
사진을 찍던 장소에 떨어져 있었다.
정신 차려야겠는걸.
그제도 식당에서 작은 주머니 가방을 놓고 나왔었는데 자꾸 실수를 하네.
간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쉰다.
이 길로는 관광객이 아닌 산꾼이 주로 다닌다.
갈림길에서 갈라지기는 했지만 전에 우리도 이 길로 내려갔었지.
앉아서 쉬면 어느 새 땀이 식어 몸이 싸늘해진다.
다시 움직이라는 신호이겠지.
배낭을 둘러메고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바위가 꽤 많은 길인데다 경사가 있어 한동안 긴장이 된다.
올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잠깐씩 기다려 주어야 하고.
오가는 사람들 중에 내 배낭을 보고는 저렇게 큰 배낭을 메고도 잘 걷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야 큰 산이 아니지만 큰 산을 다니려면 이 정도는 약과 아닌가.
여수, 순천, 광양에서 뭉친 산악회 회원들이 떼로 몰려 다닌다.
어디나 그렇지만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어 여럿이 모이면 시끄럽기는 하지.
산양읍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모여 떠들다 움직이는 그들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가기로 했다.
여기에서 좌회전해서 2km 남짓 가면 산양읍이다.
거기에서 점심을 먹고 달아전망대까지 가야 한다.
이제는 길이 오솔길 같다.
가다 보니 돌로 쌓은 城도 보이네.
사실 지금 보기에는 성이라기보다 나지막한 돌담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런데 성에 관한 안내문은 어디에도 안 보인다.
이 石城 역시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룰루랄라 콧노래라도 흥얼거려야 할 것 같은 봄길을 걷는다.
햇살이 따스해 마음마저 느긋해진다.
가다가 만나는 대나무숲은 또다른 청정한 느낌을 주어 가슴이 서늘해지고.
참으로 다양한 길이 이어진다.
봄인데도 가을 냄새를 풍기는 누런 억새는 아직도 가을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가.
억새 군락 군데군데 사진을 찍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한때의 騷擾를 이야기하고 있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야소 마을이다.
야소마을로 들어서자 꽃담이 반긴다.
빨간꽃, 분홍꽃의 동백이다.
화사한 마음에 발걸음도 느려진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늦어지는데 집집마다 대문 앞에 저건 뭐지?
집마다 특색을 살린 각양각색의 문패를 보면 저절로 웃음 짓게 된다.
정말 재미있네.
하나하나 살피며 걷는데 저절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상상하게 된다.
까치밥이 많은 집, 흙도 마음도 부드러운 집, 포도가 열리는 집, 학문의 집, 야소골 종점집,
전망 좋은 집, 도목수집, 토종벌 친구집, 비파나무집, 감나무집, 숲속의 궁전, 황소집,
웃땀 새미집...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집에 맞는 문구를 정하고, 그림을 그리고, 모양을 만드는 것도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작은 일이지만 그런 문패를 달면 적어도 그 문패에 적힌 일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참신한 발상에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무슨 의미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마을 끝에 이르니 길가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색깔과 이야기가 있는 야소골 공동체 문화마을'이라고 씌어 있네.
그러고 보니 한산도에도 冶所마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무기를 만들던 곳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란다.
유서 깊은 금평마을은 주말이면 미륵산 자락의 다랑논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또한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지역 막걸리인 산양막걸리도 생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역 특색을 살린 개성 있는 마을이 오래도록 전통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발길을 옮긴다.
얘야 여시골 논다랑이 묵히지 마라
니 어미하고 긴긴 해 허기를 참아가며
손바닥 피가 나도록
괭이질해서 만든 논이다
바람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아픈 세월 논다랑이 집 삼아 살아왔다
서로 붙들고 울기도 많이 했었다
내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묵히지 마라
둘째 다랑이 찬물받이 벼는 어떠냐
다섯째 다랑이 중간쯤 큰 돌 박혔다
부디 보습날 조심하거라
자주자주 논밭에 가보아라
주인의 발소리 듣고 곡식들이 자라느니라
거동조차 못하시어 누워 계셔도
눈감으면 환하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논
박운식의 < 아버지의 논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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