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2시 50분 점심을 먹고 배낭을 둘러멘다.
동네 뒷산 같은 오솔길이 이어지나 싶더니 별안간 된비알이다.
헉! 이 오르막길을 어쩐다?
앞배는 음식으로 채웠고 뒤는 배낭이 잡아채는데...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천천히 앞만 보고 걷는다.
길은 순한데 예상 못한 오르막길이 계속 된다.
걷다가 중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심 먹고 커피를 안 마셨다는 핑계를 대면서.
넉넉하게 3시간쯤 걸리려니 하니 그다지 마음이 급하지는 않다.
오늘은 한산도 역사길을 걷고 통영 시내로 나가면 되는 일정이니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지.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니 그나마 좀 여유가 생기네.
커피 한 잔 하고 쉬다가 다시 몸을 일으켠다.
조금 올라가니 봄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중턱에 앉아 점심을 먹는 여인네들이 보인다.
올라가지도 않고 자리를 잡은 것이 멋쩍은지 무어라 변명 삼아 말을 한다.
맛있게 드시라고 한 마디 하고 계속 오르막길을 오른다.
산길에는 오붓하게 우리만 있다.
낑낑거리면서 올라가고 있는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올라오고 있다.
헉헉대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배낭은 왜 그리 크냐고 묻는다.
배낭여행을 다니면 짐이 아무래도 커지지 않나요?
젊은 남정네가 작은 배낭을 대롱대롱 등에 매달고 가기에 나랑 바꿔 메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랬을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만 한참 가다가 서서 기다려서는
배낭 바꿔 메자고 한다.
말씀은 고마운데 농담이었구만요.
내 말을 듣고는 씨익 웃더니 발에 모터라도 달린 듯 눈앞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부럽다.
오후 1시 40분 전망대에 도착했다.
진두쪽 바다를 내려다본다.
뿌연 하늘과 바다,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 마을이 보인다.
언제 여기가 전쟁터였는지 기억하지 못 한다는 것처럼 평화스러워 보인다.
우리가 '한산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아닌가.
그래서 이 길 이름도 역사길이고.
숲이 턱턱 막힐 만큼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한동안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이제 몸이 좀 적응이 되는 것 같다.
멀리 정자가 보인다.
이제 望山이 코 앞이구나.
오후 2시 10분 망산(해발 293m)에 도착했다.
休月亭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가 멋스럽게 서 있다.
달도 쉬어가는 정자라...
누가 지었나 참으로 운치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처럼 나도 여기에서 쉬어 가야겠다.
망산 근처에 지명에 관한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 망산이 주변을 조망하기 좋아서 지은 이름인 줄 알았더니만 왜적의 동정을 살피던 곳이란다.
하기는 한산도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니 경치도, 왜적의 동정도 한눈에 보였겠지.
우리가 배에서 내린 문어포는 왜적이 길을 묻던 곳이고,
산행을 시작한 津頭는 진영이 있던 곳이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단다.
알고 보면 한산도 지명은 거의 다 그렇게 생긴 이름 아닐까.
작년에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요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고 하는데 관객들이 몰린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산도에 와서 내 두 발로 국토를 꾹꾹 밟아가며 생각에 잠긴다.
지금 이런 시간도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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