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오늘의 시 - 알혼 섬에서 쓴 엽서

솔뫼들 2022. 1. 9. 23:40
728x90

       알혼 섬에서 쓴 엽서

                                 박소원

 


잊겠다는 결심은 또 거짓 맹세가 되었다

 

시베리아 기차 좁은 통로에

슬그머니 꺼내놓고 온 이름에게

알흔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엽서를 쓴다

 

푸른색이 선명한 엽서의 뒷면에

가까운 곳이라고 쓰고

그 아래 아득한 곳이라고 쓴다

 

그러나 막상,할말이 뚝 끊겨서 오믈이라는 생선을 끼니마다 먹는다고 쓰고

꽁치와 고등어의 중간種인 것 같다고 오믈이야기만 쓴다

 

엽서보다 내가 더 먼저 도착할 지 모른다고 쓴 후

나는 지금 로비에서 서성이다 수영장 의자에 앉아 있다고

별 의미없는 動線까지도 적는다

 

풀밭에 앉아

네잎크로버를 찾는 사람

푸른 호수로 내려가는 사람

전망대쪽으로 올라가는 사람

길의 방향은 각각 다르지만

영혼의 處所도 각각 다르지만

해가지지 않는 저녁

일행들은 약속처럼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입으로만 웃음을 보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보드카를 마신다고... 그리고

너무 먼 낯선 이 곳은

마치 동화의 나라와 같아서

기적을 다시 믿고 다시 꿈을 꿀 것 같다고도 쓴다

 

피로하여 하도 피로하여 자꾸 할말이 줄어들지만

그러나 이 아름다운 순간을 침묵할 수는 없어서 샛노란색 꽃을 꺾어

바이칼 호수 지도 사이에 넣고 다닌다고도 쓴다

 

아픈 손으로

쓰는 엽서는 통증 속에서도 章을 넘긴다

여행지에서 마다 습관처럼......

세상에 없는 너에게

나는 눈물없이도 내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네가 없는 나는 아무래도 사람도 귀신도 아닌

人間과 鬼神의 중간 種인 것만 같다고

마침표를 찍고도, 추신 한 줄 덧붙인다

'오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시 - 눈사람  (0) 2022.01.23
오늘의 시 - 고드름  (0) 2022.01.16
오늘의 시 - 하루로 가는 길  (0) 2022.01.02
오늘의 시 - 사라진 서점  (0) 2021.12.26
오늘의 시 - 무진등  (0) 20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