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노루 나희덕 마음이 궁벽한 곳으로 나를 내몰아 산 속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달리다 보면 손은 수시로 뿔로 변하고 발에는 단단한 발굽이 돋았다 발굽 아래 무엇이 깨져 나가는지도 모르고 밤길을 달리다 문득 멈추어 선 것은 그 눈동자 앞이었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의 눈빛, 길을 잃어버리기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에 놀라 주춤거리다 도로 위에 쓰러진 노루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노루가 울고 있다고 느꼈다 저 어리디 어린 노루는 산 속에 두고 온 스무 살의 나인지도, 말없이 사라진 사람인지도, 언젠가 낳아 함부로 버린 어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안의 노루야,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발굽으로 불행을 추월할 수는 없다 해도 일어나 어둠 속의 길을 마저 건너라 저 울창한 다래와 머루 덩굴 속으로 사라져라 누구도 너를 다시 찾아낼 수 없도록 |
'오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시 - 내 손바닥 위의 숲 (0) | 2021.06.27 |
---|---|
오늘의 시 - 유월 소낙비 (0) | 2021.06.20 |
오늘의 시 - 초여름 (0) | 2021.06.06 |
오늘의 시 - 꽃이 핀다 (0) | 2021.05.30 |
오늘의 시 - 그릇 (0) | 2021.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