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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오늘의 시 - 노루

by 솔뫼들 2021.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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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루

                               나희덕 

  마음이 궁벽한 곳으로 나를 내몰아 
  산 속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달리다 보면 손은 수시로 뿔로 변하고 
  발에는 단단한 발굽이 돋았다 
  발굽 아래 무엇이 깨져 나가는지도 모르고 
  밤길을 달리다 문득 멈추어 선 것은 
  그 눈동자 앞이었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의 눈빛, 
  길을 잃어버리기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에 놀라 주춤거리다 
  도로 위에 쓰러진 노루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노루가 울고 있다고 느꼈다 
  저 어리디 어린 노루는 
  산 속에 두고 온 스무 살의 나인지도, 
  말없이 사라진 사람인지도, 
  언젠가 낳아 함부로 버린 어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 안의 노루야,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발굽으로 
  불행을 추월할 수는 없다 해도 
  일어나 어둠 속의 길을 마저 건너라 
  저 울창한 다래와 머루 덩굴 속으로 사라져라 
  누구도 너를 다시 찾아낼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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