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그 겨울 소요산 (1)

솔뫼들 2017. 12. 29.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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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과 추위가 나를 밀어내는 시간,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오전 7시 집을 나선다.

새벽시간이라 버스는 씽씽 잘도 달리고, 이른 시간이라 여겼는데 전철역에는 무얼 하는 사람들인지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소요산에 가려면 사당역에서 창동까지 4호선으로 이동한 후 다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소요산역까지 가야 한다.

소요산은 서울에서 꽤 먼데도 불구하고 전철역에서 바로 들머리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지.


 오늘은 박총무와 둘이다.

혼자라면 이런 날씨에 굳이 먼데까지 가지는 않겠지.

앞산이나 뒷산을 어슬렁거릴까 싶던 차 늦은 밤에 박총무의 문자가 소리를 쳤다.

'나 산에 간다고.'



 오전 9시 58분, 소요산역에 내리니 생각보다 사람이 적다.

물론 바람결은 서울보다 한층 차갑고.

들머리를 따라 걷는데 박총무가 컵라면을 안 샀다고 한다.

입구에서 바로 능선으로 오르려던 계획을 수정해 올라가는 길에 사기로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가는 길에 있는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고 더 가면 가게가 없는 것 같다고 주차장 관리인이 말한단다.

하는 수 없이 박총무는 발길을 돌려 다시 뛰어 내려간다.

아침부터 준비운동 제대로 하는구만.


 박총무를 기다리느라 근처를 어정거리는데 작은 표석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이태조행궁지'라고 씌어 있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길을 떠날 때 머물던 행궁이 있던 자리라는 말이겠지.

모르기는 해도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태조는 후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마음이 안 들어 고향인 함흥에 가 있었으니 거기를 오갈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이든 아니든 '함흥차사'라는 말도 그런 상황에서 나왔겠지.

이태조의 능은 동구릉에 있는데 유언을 받들어 가을이면 봉분 위에 심어 놓은 함흥 억새를 지금도 깎지 않는다고 한다.

죽은 다음이라도 그 뜻을 받든다는 의미에서 정성이라고 해야 할까?


 전에 왔을 때는 이 표석을 못 보고 지나쳤다.

여럿이 어울려서 웃고 떠들며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단출하게 오니 눈에 들어오네.

그리고 최근 부쩍 역사에 관심이 가니 하나도 허투로 보이지 않는다.

표석 주위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긴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박총무를 만나 자재암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자재암은 원효와 요석 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오는 암자이다.

그래서 산에는 공주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사실 원효봉이나 의상봉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다른 산에도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공주봉이라는 이름은 소요산에서 처음 접했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당시에 말이 많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 설총이라는 천재가 태어나 이두를 집대성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우리 역사에 도움이 된 것 아니었을까?

갑자기 원효를 가까이 한 요석공주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탈문을 지나 자재암으로 가는 길목,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면서 어릴 적 추억에 잠시 젖어보기도 하고, 얼어붙은 계곡물에서 썰매를 지치다 넘어졌던 기억에 슬며시 웃음을 머금기도 한다.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노년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입구에서는 눈을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차츰 길에 눈이 많아진다.

오늘 완연한 겨울 산행이 되겠는걸.

언제부턴가 뚜벅뚜벅 걷던 걸음이 겨울만 되면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 하게 된다.

넘어지면 회복이 힘든 나이가 된다는 걸 저절로 몸이 체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 추위에도 불공을 드리는 신자가 있는지 동굴로 된 나한전 앞은 발길이 분주하다.

나한전 앞에서 왼편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이 길은 하백운대까지 거의 계단길을 올라야 한다.

계단길이 싫어서 능선을 타려 했는데 이렇게 됐군.

박총무는 소요산이 처음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는 코스로 가는 것도 괜찮겠지.



 오전 10시 50분,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에 들어선다.

계단은 생각보다 많다.

숨을 헉헉거리며 오르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군.

숨을 몰아쉬며 가다가 잠시 쉬기로 했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서인지 허기가 진다.

계란과 커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좀 정신이 드네.


 다시 계단길을 오른다.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이니 힘을 내 보자.

잔뜩 찌푸린 박총무 표정이 힘들다고 말한다.

힘들지 않으면 산행이 아니겠지.

등에 땀이 나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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