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고사리밭길에서 ; 남해 바래길 7코스 (2)

솔뫼들 2016. 9. 2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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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참다래처럼 실제로 무화과 열매가 달린 모습은 처음 본다.

중부지방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기 쉽지 않다.

점점 기후 변화가 심해지니 이제 중부지방에서도 무화과가 잘 자라는 것 같기는 하지만.

 

 

 길은 두 가지로 나뉜다.

고두에서 바로 식포로 가는 길과, 언포에 들렀다 식포로 가는 길.

언뜻 보면 전자가 쉬울 것 같지만 거리도 더 멀고 산길이 이어진다.

천포까지 오는 산길에 질려 당연히 쉬운 길을 선택했다.

 

 뱀처럼 이어진 길이 보인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구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길을 툭툭 지팡이가 바닥에 닿는 소리만 바람소리에 묻힌다.

오르막길이라 다시 속도가 느려졌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겠지.

 

 가다 보니 언포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이정표 방향도 그렇고 지도상으로도 언포에 들러가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내리막길로 들어서 마을에 도착했다.

길에는 가로수처럼 열매를 매단 무화과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이렇게 무화과를 심기도 하는구나.

 

 

 공사판 옆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어떤 분이 막다른 길이라고 일러준다.

아이고! 짧은 거리를 선택했는데 헛걸음을 했다는 말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힘든데 족히 1km 넘게 '알바'를 한 셈이다.

그래도 거기에서 되돌릴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좋다고 내려왔는데 헉헉대며 올라가야 한다.

 

말 한 마디 없이 길을 따라 걷는다.

말할 기운도 없고, 기분도 가라앉았다.

거리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는지,

그 동안 물이 떨어져 고생하지는 않을지,

저물기 전에 동대만 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

 

갈림길에서 다시 오르막차도를 따라 걷는다.

언덕배기에 정자나무 하나 늠름하게 서 있다.

종일 걸은 몸을 잠깐 눕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제 내리막길이다.

정말 지쳤다.

쉴 곳도 거의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그래도 목 한번 축이고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냥 도로변 한쪽에 의자를 꺼내어 앉는다.

집에서부터 가져온 구운 달걀 2개씩과 친구의 물통에 있던 물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보온병의 물을 식으라고 물통으로 옮긴다.

적어도 이제 산길은 없을 것 같고 거리도 많이 줄였으니 조금 여유를 찾자.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시 몸을 일으켠다.

가장자리에 미국자리공과 칡덩굴이 무성한 길을 따라 걷는다.

걷다 보니 식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는군.

본래 시간상 이곳에서 일정을 마칠 예정이었지만 이곳 역시 고만고만한 시골 마을 아닌가.

숙소와 음식점은 고사하고 구멍가게 하나 없을 것 같은 마을이다.

 

식포를 지나 내처 걷는다.

옆으로 파도소리가 들린다.

이제 동대만에 도착했다는 말이겠지.

길은 도로를 벗어나 동대만을 끼고 오솔길처럼 만들어진 데크로 안내한다.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휴! 한숨이 나온다.

 

 

 데크를 따라 걷다가 잠깐 풀숲 사이로 들어간다.

그러더니만 다시 둑으로 내려선다.

남해안에는 드문 갯벌이 동대만에 있다더니만 한쪽에 스스스 갈대의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뉘는 갈대들의 몸짓이 처연하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나도 흔들려도 될 것 같아

바람이 불면 바람처럼

비가 오면 내리는 비처럼

흔들려도 괜찮을 것 같아

흔들려도 흔들리면서도

네 품은 따스하게 살아

새들의 젖은 날개를 털어주고 있잖아

그리움에 문을  밝힌 새떼들이

길을 만들어 날아 오르잖아

너에게 몸을 맡겨 흔들리다 보면

몸이야 흔들리든 꺾이든

마음만은 끄떡없이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아

바람 속에서도 고요히 마음을 누이는 법

알게 될 것 같아

 

     김청미의 < 갈대숲에서 > 전문

 

 

 꽤 길게 이어진 방조제를 따라 걷다가 다시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바닷가를 따라 걷고

그러다가 이제는 농로를 따라 걷는다.

대로가 가까웠으니 다 왔다는 말인데 눈에 띄는 건물 중 어느 것이 동대만 휴게소일까?

불이 켜진 곳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적어도 조그만 휴게소는 아닐 거라면서, 거기에 가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있을 거라고 위안을 삼으면서 걷는다.

정말 몸이 축축 늘어진다.

천근만근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갑자기 다리가 훅 꺾인다.

물집이 잡힌 발가락도 불편하다 못해 쓰리다.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지.

도로로 올라서니 편의점 너머에 동대만 휴게소를 알리는 입간판이 커다랗게 보인다.

 

 드디어 다 왔구나.

오전 9시 10분에 걷기 시작해서 오후 5시 57분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려 30km 걸었다.

물이 모자랄까 걱정했는데 날씨가 흐린 덕에 버틸 수 있었고, 비록 땀은 나도 종일 부는 거센 바람에 바로 말라 그다지 덥다는 생각을 안 하고 걸었다.

물론 커다란 배낭을 메고 30km를 걷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남해 바래길을 걷는 일정 중에 오늘 가장 오래 걸은 셈이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몸도 피곤하고...

얼른 쉴 곳을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