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적지는 미국마을이다.
그런데 미국마을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면 좋으련만 이정표는 한동안 원천이라고 나오다가
다시 화계라고 나온다.
미국마을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답답하구만.
희망을 갖고 걸을 수 있도록 이정표가 일관성있게 되어 있고 거리 표시가 정확하면 걷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얼마쯤 걸었을까?
길은 또 슬그머니 산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갈 길이 먼데 산길이라니 또 마음이 무거워지는구만.
하지만 어쩌랴.
산길 입구에 있는 펜션의 개 짖는 소리를 친구 삼아 산길로 접어든다.
다행히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은 길이다.
바다를 앞에 두고 간간이 집과 계단식 밭이 발 아래 펼쳐진다.
험상궂게 달려드는 칡덩쿨은 여기에서도 간혹 길을 점령하고 있고
이름 모를 흰색 들꽃이 길 가장자리를 수놓고 있는 길이다.
걷다 보면 나오는 다리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네.
어차피 만들 거라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다리 아래 떨어진다고 목숨에 지장이 있지는 않겠지만 한번도 마음 놓고 건널 수 없게 아슬아슬하다.
녹도 슬었고, 발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니 걷는 것이 아니라 발이 조바심을 하느라
곡예라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비슷한 다리를 두어 번 건너면서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게 된다.
드디어 미국마을 바로 위쪽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으니 용문사에 들렀다 가야겠지.
친구를 기다렸다가 용문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올라갔는는데 남해로 유배왔던 서포 김만중의 동상이 서 있다.
서포문학공원이란다.
사실 문학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해 보이지만 멀리 김만중이 귀양왔던 노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조성한 모양이다.
간단히 문학공원을 둘러보고 용문사로 향한다.
용문사에 가는 길은 계속 오르막 포장도로이다.
지친 데다 오르막길이라서인지 갑자기 배낭 무게가 갑절 무겁게 느껴진다.
다리를 끌다시피 억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석탄일이 머지 않아서인지 용문사로 오르는 길 옆으로 紙燈이 매달려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이 등에 불이 밝혀지면 그것만으로도 장관이겠구나.
가능하면 환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오르다 보니 용문사에 도착했다.
용문사는 호랑이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虎丘山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 때 원효대사가 금산에 세운 보광사를 移建한 것이란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도 불 만하지만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내가 누워도 될 정도의 커다란 구유였다.
무려 1000명이 먹을 수 있다는 구유는
절에 큰 법회가 있을 때나 대작 불사를 회향할 때 주로 사용했다는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밥통으로도 사용되었단다.
천천히 절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린다.
내려오는 길에는 여유가 생기니 물소리도 들리네.
산길로 가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미 몸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고 있다.
사람이 참 간사하기도 하지.
올라갈 때 그리도 멀게 느껴지던 거리가 내려올 때는 반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용문사를 다녀오는데 40분 걸렸다.
이제 미국마을을 따라 내려가면서 집 구경을 한다.
재미교포들이 남해에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조성된 미국마을은 가구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마을 앞에 자유의 여신상을 세워 놓고 미국마을임을 선언한다.
깔끔한 외관이 인상적인 곳이라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려 다양한 모양의 집들을 구경하며 가노라니
작은 카페가 보인다.
친구와 어제 만난 여행자 이야기를 하면서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카페 '이강'은 독특한 분위기의 여주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어제 만난 여행자가 용문사 다녀오는 길에 들러 주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곳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궁금증이 일어 그 이야기를 하니 주인은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전직 독어 교사였다는 그 분은 자신과 공통점이 많아 대화가 아주 잘 이어졌노라면서.
우리도 용문사에 다녀왔다고 하니 용문사에 올라가 찻잎을 따 주어야 한단다.
가서 도와주지 않으면 금세 차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면서.
곡우 무렵 딴 차를 최고로 치는데 벌써 곡우가 지나기는 했다.
수박 겉 핥기로 보아서 그런가 용문사를 둘러보면서도 그곳에 차나무가 있는 줄 몰랐네.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잔의 차를 들자
오세영의 < 그리움에 지치거든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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