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다랭이지겟길에서 ; 남해 바래길 1코스 (2)

솔뫼들 2016. 5. 1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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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보기에 깔끔한 집들이 이어져 있다 싶은 곳은 항촌이었다.

별별 이름을 붙인 집에 별스런 모양을 한 집을 구경하느라 눈이 바쁘다.

그것만도 볼거리가 충분하네.

 

엄청나게 크고 호화스러운 항촌 펜션단지를 지난다.

이제 남은 거리는 5km 남짓.

젖 먹던 기운까지 더해 가야겠지 싶어 억지로 힘을 내 보는데 눈 앞에 나타나는 길은 다시 산길이다.

아무리 평탄하다고 해도 산길은 오르막길이 있게 마련이지.

끝까지 애를 먹이는구만.

뒤에서 오던 친구는 턱 하니 버티고 있는 산길에 기가 막히는지 아무 말 없이 부루퉁한 표정이다.

눈빛으로 서로 위로를 하고 물 한 모금 나누어 마신 다음 산길로 들어선다.

 

 

 산은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다.

돌이 많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도 없고 조금은 어둑신해지니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나무도 풀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어서 산길을 벗어나고 싶을 뿐.

 

일찌감치 꽃을 피운 찔레꽃향이 코에 스민다.

대중가요에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라는 노랫말을 가진 것이 있었다.

내가 만난 찔레꽃은 다 흰색이었는데 붉은 찔레꽃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릴 적에 시골에서는 찔레순을 먹기도 했다.

나는 유독 가리는 게 많아 다른 친구들이 아까시꽃이나 찔레순이나 골담초꽃을 먹을 때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먹을게 없는 70년대 시골에서 산을 쏘다니다 만나는 많은 것들이 입으로 들어갔다.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라고 하겠지.

 

 

 얼마를 걸었을까?

눈 앞이 훤해지는 느낌에 발걸음을 빨리 하니 카페와 펜션을 겸하는 집 옆으로 내려선다.

다시 차도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친구를 기다렸다가 차도를 따라 걷는다.

발 밑에 그려진 그림이 눈길을 끈다.

바래길을 안내하는 그림인데 머리에 함지박을 인 여인이 아이 손을 잡고 걷고 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 엄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생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해가 설핏해졌다.

혹시나 멋진 일몰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날씨 때문에 물 건너 갔다.

다시 올망졸망 이어진 밭둑을 따라 걷다 보니 가천 다랑이마을이 눈 앞에 있다.

드디어 다 왔구나.

오후 6시 50분 다랑이 마을에 도착해 안내판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다.

점심도 못 먹고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해 16km를 걸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항촌부터 걷기가 불편한 걸 보니 또 물집이 서너 개 잡힌 모양이다.

오후에 무리를 했네그려.

 

암수바위를 둘러보며 4년 전 왔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근처에 오가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데 한 남정네가 혼자 찬찬히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

일행이 없나?

해거름에 혼자 서성이는 모습이 별스러워 보인다 싶다.

 

 

사진 몇 장 찍고 친구가 오는 걸 기다리는데 친구가 오다가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그러더니만 가까이 온 친구 말이 그 사람이 자기 차에 우리를 태워줄 수 있다고 했단다.

저 아래까지 내려가서 보고 올 동안 기다리라면서.

정말 혼자 여행을 온 모양이군.

 

다짐하는 일도 흐려버리는 일도 누구에겐가

지독한 빛이어서 극광까지

밀려가버렸다고 깨닫는 지금

구름다리도 걷혀버린 강 이쪽에서

건너편 저무는 버드나무 숲 바라본다

얽혀 자욱하던 눈발도

그 속으로 불려 나가던 길들도 그쳤는데

어스름 저녁 답은 무슨 일로 한참을 서성거리며

망명지에선 듯 서쪽 하늘 지켜보게 하는가

사랑이여, 다 잃고 난 뒤에야

무릎 꺾어 꿇어앉히는 마음의 이 청승

쟁쟁한 바람이 쇳된 억새머리 갈아엎으면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절룩이며 산등성이를 넘어간 그 짐승

밤새도록 흘렸을 피 같은 어둠이 몰려온다

 

              김명인의 < 어두워지다 > 전문

 

 

어둠이 깊이를 더해가고 혹시나 싶어 버스를 기다리지만 버스는 종내 소식이 없다.

결국 그 여행자 SUV에 동승을 하게 되었는데 타고 보니 차 안에 한 살림 차렸다.

알고 보니 차를 타고 전국을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교사로 은퇴를 했다는데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차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한다고 했다.

한번 떠나면 한 달 이상 길 위의 인생이 되니 당연히 짐이 많을 수밖에.

 

 

 

 한 도시에 2~3일 정도 머물며 주로 체육공원 같은 곳에 차를 세우고 잔다는데 시설이 좋은 체육공원에서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도 있다고.

오늘 남해에 처음 왔으니 며칠 둘러볼 계획이라는데 용문사에 들렀다 미국마을 카페에서 주인 여자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혼자 다니면 그런 재미가 있다고 하네.

이야기하기를 무척 즐기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대단하다고 하니 그 분은 배낭을 메고 종일 걸어다니는 우리가 또 대단해 보인단다.

 

 어찌 되었든 재미있는 여행자를 만나 덕분에 오늘 하루 마감을 잘 하는구나.

어제는 관광안내소 직원 차를 얻어타고, 오늘은 다른 여행자 차를 얻어타고.

다른 사람을 태워준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

도보여행을 다녀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남해는 특별한 곳으로 기억이 되겠군.

 

 남해읍에서 그 분과 작별을 하고 불이 켜진 음식점을 겨우 찾아간다.

소도시는 상점 문을 일찍 닫는 바람에 자칫 꿈지럭거리면 저녁을 굶을 수도 있다.

저녁을 먹은 다음 지친 다리를 끌다시피 하고 숙소를 찾아간다.

내일은 늦잠을 자고 조금 늦게 출발해야겠다.

하루가 참으로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