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KTX를 타고 울산에 내려와 남목에서 잠을 자고 아침 8시 35분에 다시 길로 나선다.
내심 일기예보가 빗나가기를 바랐는데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추적추적 계속되고 있다.
그리 양이 많지는 않아도 맞으면 감기 들기 딱 좋겠다 싶어 우산을 쓰고 걷는다.
현대중공업 담장을 끼고 걷는 길이 이어진다.
다시 한번 얼마만한 기업인지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다.
거리를 걷는 동안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현대중공업 점퍼를 입었다.
심지어 고물을 수거하기 위해 손수레를 끄는 어르신까지도.
한때 현대중공업에 근무했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선가 얻었을 수도 있겠지.
그만큼 현대중공업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일 것이다.
벚꽃은 이미 져서 이파리를 내밀었고 길 옆으로 유채꽃이 노랗게 아침 인사를 한다.
특별히 볼것이 없는 자전거길이지만 그래도 담장을 끼고 만들어진 꽃밭을 보면서 걷는다.
이 길로 근로자들의 자전거 행렬이 이어지면 볼 만하겠는걸.
거기에다가 건너편 건물을 보는 재미도 괜찮다.
저 알록달록한 건물은 용도가 무얼까?
사선으로 모양을 낸 건물도 시선을 확 잡아끈다.
대규모 공장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번화가는 공장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겠지.
걷다 보니 현대백화점, 현대 아파트, 울산대병원, 현대 호텔 등등 현대 그룹과 관련된 거리가 이어진다.
확실하게 울산이 '현대'의 도시임을 확인시켜 준다.
깨끗하게 단장된 거리, 세련된 건물들...
내 머리 속에서 울산이 그저 공장 굴뚝이 하늘을 가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벗겨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거리가 다시 오래된 상가가 늘어선 거리로 바뀌었다.
우산을 들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도 불편하고 눈요깃거리도 없어서 앞만 보고 걷는다.
그래도 힘이 든 것이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수시로 우산을 공격해서 우산을 붙잡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이 비가 오전에 그쳐 준다면 참으로 고맙겠다.
그저 부지런히 걷는다.
어제 못 걸은 것까지 벌충하려면 오늘 걷는 거리를 늘려야 한다.
그나마 체력이 좋을 때 많이 걷는 것이 낫겠지.
열심히 걷다 보니 다시 거리가 깔끔해지고 번화해졌다.
커피전문점에 아웃도어 의류점,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상점들이 이어져 있다.
여기도 먹고 놀기 좋은 곳이군.
홈플러스를 끼고 좌회전하라고 안내 스티커가 일러준다.
조금 걸으니 해변이 나왔다.
여기가 일산해변이구나.
정자항에서 시작되는 해파랑길 9구간이 여기에서 끝난다.
사방을 둘러보며 혹시나 해파랑길 안내판이 있나 찾아보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마음 속으로 또 한 구간 힘겹게 끝났구나 지워나갈 뿐이다.
일산해변은 낮이라서 그렇지 밤이라면 정말 불야성이라는 말이 실감날 것 같은 곳이다.
바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주말이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리라.
여기저기 둘러보니 재미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고기를 주로 파는 음식점 같은데 음식점 이름이 '외식 중공업'이란다.
푸하하! 주인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비 내리는 해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일산해변을 알리는 조형물과 화분이 촉촉히 봄비를 맞고 있다.
예쁘게 만들어 놓은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지만 비 때문에 엄두가 안 난다.
우산을 들고 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그리 잘 나올 것 같지도 않고.
한번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오전 10시 5분. 이제 대왕암 공원으로 이어진다.
고문님께서는 앱을 확인하시고 해안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해파랑길 리본은 잘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오르라 한다.
날씨도 안 좋은데 편한 길로 가시지요.
계단을 따라 오르자 울창한 솔숲이 나타난다.
정말 개인 날에 오면 피톤치드향이 코를 찌를 듯 싶다.
그런데 바람과 싸우느라 그런 걸 느낄 겨를이 없다.
우산은 수없이 훌떡 뒤집어져 속을 썩이지 계속 내리는 비에 손은 시리고 우산을 들고 걷느라 팔은 아프고...
2월 영덕 구간을 걸을 때 혹한이 이어진 걸 빼면 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날씨가 무척 좋았다.
바닷가이다 보니 바람은 비교적 심하게 불었지만 그것 때문에 그만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비와 바람이 쌍으로 괴롭히고 있네그려.
그래. 한번쯤은 이런 고생스런 날씨를 겪어야 좋은 날씨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겠지.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안내리본은 친절하게 우리를 인도한다.
해안 절벽 옆에 조성된 포토존은 예쁘게 사랑을 키워갈 연인들을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냥 예쁜 공간 사진만 찍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우산이 또 훌러덩 뒤집어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우산 살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다행히 우산을 쓰는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정말 울고 싶은 순간이다.
고문님께서는 이런 날씨에 견디는 걸 보니 우산이 참 튼튼하다고 하신다.
평소 산에 갈 때 쓰는 우산을 가져올까 여러 번 생각하다가 무게가 가벼운 대신 약한 것이 흠이라
날씨를 확인하고 이 우산을 넣었는데 팔은 아프지만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우산을 가져왔으면 한번 뒤집히고는 바로 망가져 못 쓰게 되었으리라.
우산을 접었다 다시 펴서 더 속을 썩이는 곳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몇 시간을 쉬지도 못 하고 걸으니 다리도 아프고 슬슬 허기도 진다.
내가 연비가 안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에너지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비와 바람 때문에 어디에서도 쉴 수가 없다.
정자가 만들어진 곳도 비가 들이쳐 젖었고 바람을 피할 수가 없다.
잠깐 망설이다가 배낭 허리 주머니에 있는 초콜릿 몇 알 먹고 내처 걷는다.
여기도 산이라 험하지는 않지만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있다.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건 부부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남편 소나무인지 아내 소나무인지 소나무 한 그루가 비실비실 병이 난 것 같다.
치료중인 것 같은데 완치되기 어려워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미바위라는 것도 있다.
비 속에 해안 비경을 구경하며 가는데 갑자기 공사중이니 돌아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진작에 안내문을 붙여 놓았으면 여기까지 오는 수고도 덜 수 있었으련만..
뒤돌아서 가다가 산길로 접어든다.
방향을 보건대 막힌 길과 어디선가 만나리라 짐작이 되더니 딱 맞았다.
그 다음 다시 길 안내리본을 따라 걷는다.
공원에는 여기저기 갈림길이 여럿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가 고문님께서 다시 바다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나는 편안한 길로 가겠다고 했다.
고문님은 그쪽으로 가시라고 하고.
한참 걷다 보니 고문님도 내가 가는 쪽으로 따라오고 계시다.
사실 대왕암 공원은 쾌청한 날이라면 청청한 소나무의 기운을 받으며 산림욕도 즐기고, 바닷가의 기암괴석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인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니 그저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해 본다.
그렇게 바닷가를 따라 걷고 있는데 뒤쪽에 바위로 병풍처럼 이루어진 것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대왕암이었다.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궂은 날씨에 되돌아갈 생각은 안 든다.
그저 멀리서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그런데 대왕암은 신라 통일의 기초를 닦은 문무대왕 묘라고 한다.
경주에도 대왕암 묘가 있는데 어떤 것이 진짜일까?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나서 임꺽정이든 심청이든 자기네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문무대왕 수중묘가 그렇게 된 것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문무대왕 妃가 죽어서 문무대왕처럼 동해의 호국龍이 되어서 이 바다에 잠겼다 하여
대왕바위라 불렸다고 한다.
왕이나 왕의 유언을 따라 자신도 수중릉을 택한 왕비나 선조들의 호국정신에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된다.
대왕암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고 하고 길 옆에 핀 들꽃을 바라보며 걷는다.
무리지어 핀 낯선 꽃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바위에 쓸리는 몽돌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다그라락 다그라락 몽돌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합작품이 오늘 내 귀를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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