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해파랑길을 걷다 (14코스- 경북 포항)

솔뫼들 2015. 4. 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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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친 몸을 잠으로 달래고 일어난 아침, 엊그제보다 날씨가 풀렸다.

종일 길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날씨는 얼마나 중요한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선다.

파도도 어제보다 훨씬 잠잠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제 저녁을 먹은 주유소가 있는 곳에서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하는가 보다 했더니만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또 안내한다.

역시나 바닷가에서 모래를 밟고 바위를 건너뛰며 걷는 길이다.

해파랑길 포항 구간의 특징을 들라고 하면 바로 길이 없을 것 같은 바닷가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물론 길이 걷기 불편하고, 때로는 지저분하고, 오폐수도 흐르고...

앞으로는 개선이 되리라 믿어 본다.

 

 

 바닷가를 돌자 결국 주유소 인근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개와 유독 친하지 않은 고문님을 보고 짖어대는 개소리가 주변을 깨운다.

고문님께서는 짖어대는 개를 보고 투덜거리시지만

사실 애완견도 아닌데 낯선 사람을 보고 아무 기척이 없으면 개를 왜 키우겠는가.

 

 도로를 따라 걷다가 다시 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밭 사잇길로 들어선다.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정경이 이어진다.

파릇파릇 나온 것이 밀인가 보리인가?

바싹 마른 흙이지만 푸르름과 조화를 이루니 푸근한 느낌이 차오른다.

 

 

 어젯밤 뉴스에 경주에서 산불이 발생했는데 바람을 타고 심각하게 번진다고 했다.

그래서 밤인데도 불구하고 포항에서까지 미리 대비를 하고 있다고 했던가.

우리 같은 도보 여행자에게는 불편하겠지만 촉촉하게 봄비가 내려주면 좋으련만

하늘은 점점 더 쨍쨍해진다.

 

 밭을 지나 도로로 나섰다가 다시 산뜻하게 지은 펜션 사이로 지난다.

군데군데 크게 지은 펜션들이 있는 걸 보면 여기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겠지.

어떤 곳은 펜션과 캠핑장을 겸해 엄청난 크기로 공사중이다.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해파랑길을 걸으며 만난 숙소들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놀러다니기만 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물론 살면서 재충전의 기회야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그러다가 다시 길은 묵은 동네로 들어섰다.

어구를 보관하는 마을 단위 창고가 보이고,석병리 性穴이라는 안내문도 보인다.

성혈은 바위에 구멍을 낸 것을 이르는데 '알구멍'이라고도 부른단다.

선사시대 종족 보존과 노동력 확보를 위해 표현한 태양, 여성의 성기, 알, 구멍 등을 상징한다고.

오래도록 다니면서도 성혈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해 자세히 읽어보고 들여다본다.

 

 석병리를 지나 삼정리로 접어들었다.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고 쉴 곳을 찾는데 그래도 바람을 피할 곳이 없다.

어제보다는 한결 나으니 그냥 바닷가 적당한 곳에 앉았다.

해산물을 말리는 곳인가 본데 오래 된 해산물의 비린내가 풍긴다.

그래도 자리가 편하니 바닷바람을 즐기며 커피 한잔을 마신다.

점점 고약해지는 비린내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지만.

 

 

 가는 길마다 과메기 판매를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드디어 구룡포가 가까워졌다는 말이겠지.

과메기는 구룡포의 특산물이다.

영일만에서 조업을 하던 어부들이 청어를 잡아다가 배에서 말려 먹었는데 먹을 만하자 대량생산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청어나 꽁치를 겨울 바닷바람에 말리면 몸에 좋은 DHEA가 많이 생긴다던가.

개인적으로 나는 그리 즐기지 않지만 온갖 채소에 싸먹는 과메기맛이 별미이기는 하다.

 

 구룡포에는 물회를 하는 음식점도 많단다.

그 옛날 포항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느라 끼니를 먹을 새도 없이 바쁠 때,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잘게 썬 다음 야채와 함께 고추장을 풀고 물을 부어 한 사발씩 들이켰다고 한다.

어부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다가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점점 알려지면서 포항 사람들이 즐겨먹는 향토음식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 것이 바로 포항 물회라고 한다.

물회 역시 수도권에서는 그리 달갑게 먹지 못 했었는데 이번에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만난 물회는 나를 사로잡았다.

더울 때 먹으니 시원하면서도 달콤하고 생선회가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고나 할까.

 

 

오전 11시, '구룡포'라는 단어가 잇달아 보이더니 드디어 구룡포항이다.

여기에서 해파랑길 14코스가 끝난다.

오늘 지금까지  9km 걸었다.

바닷가에는 구룡포 해산물 잔치를 알리는 간판이 크게 서 있다.

11월에 열리는 구룡포 과메기 축제 외에도 여러 가지 축제가 열리는 모양이지.

 

 주변을 둘러보다 잠깐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이른데 여기에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해야 하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여야 하는지

둘인데 또 의견이 나뉜다.

나는 나중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걷자는 의견이고

고문님께서는 여기에서 걷는 것을 중단하고 죽도시장으로 이동한 후 점심을 먹고 시장을 둘러보자고 하신다.

 

 일단 버스 시간을 알아본다고 하신 고문님께서 버스가 두시간에 한대씩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금방 한 대가 출발했다고.

아니 이렇게 유명하고 큰 지역에서 무슨 대중교통이 그 모양이래?

불평을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시간을 보낼 겸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전에는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었는지 전혀 몰랐었다.

동해 최대 어업전진기지였다는 구룡포항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만들었고 일본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자 물 반 고기 반이라던 구룡포로 대거 이주해 왔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떠난 후 점차 일본인들이 살았던 흔적이 사라지고 훼손되는 것을 보고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포항시에서 근대문화역사거리로 조성했다고 한다.

 

 거리를 둘러보니 적산가옥들이 아직도 남아서 정말 일본인 거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처자가 지나가는데 영락없는 일본인 같다.

하시모토가 살았던 집이라는 근대역사관에서 방영되는 텔레비전에는 구룡포에 살았던 일본 노인들이 나와서 구룡포에 대해 고향 운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고 자라면서 뛰어논 곳이고 어릴 적 죽마고우가 있는 곳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지금의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기분이 묘한 이야기였다.

 

 

 또 기억나는 것은 구룡포 공원 입구 계단에 돌기둥을 세워 일본인들이 구룡포항을 세우는데 공을 세운 일본인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해방 후 구룡포 주민들이 돌기둥에 쓰인 일본인들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시멘트를 바르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시는 충혼각을 세우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뒷부분에 써어 앞뒤를 돌려 놓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공원 입구에서 물끄러미 돌기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공원에 오르니 꿈틀거리는 용 조각이 우리를 맞아준다.

九龍浦, 아홉 마리 용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을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근대문화역사거리를 둘러보고 공원을 내려오니 버스가 앞에 대기하고 있다.

두 시간에 한번 있다는 버스가 무슨 일이지?

다가가서 확인하니 배차간격이 2시간인 버스는 호미곶 가는 버스였단다.

다음 번에 3번만 오면 해파랑길을 끝낼 수 있다는 고문님 말씀에 설득이 되어 바로 출발한다는 버스를 타고 죽도시장으로 향한다.

 

 죽도시장에 도착해서 일단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인원이 단출해 회를 먹기는 마땅치 않고 거리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겠다 싶어서 돌아보는데

수제비나 칼국수가 유명한지 간판이 여럿 보였다.

고문님은 자꾸 다른 곳을 찾으시는데 나중에 보니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으시는 것이었다.

결국 지하의 한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나왔다.

 

 

 그런 후 다시 시장을 돌며 구경을 하다가 사람들이 아까부터 줄을 서 있는 호떡집이 궁금했다.

사실 줄이 짧아지면 호떡 하나 사 먹어야지 했는데 점심을 먹고 오는 동안 줄이 더 길어졌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네.

 

 씨앗 호떡은 1000원, 치즈 호떡은 1500원.

청년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차린 노점인데 평일인데도 이렇게 줄을 서는 걸 보면 매상이 상당히 많으리라.

일찌감치 창업으로 방향을 잡은 청년들이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다른 노점과 달리 깔끔하고 제품에 대한 설명을 써 놓아 사 먹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만든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름기가 많지도 않고, 너무 달지도 않고, 견과류가 씹히는 맛이 입맛에 잘 맞았다.

뜨거운 씨앗호떡을 후후 불며 먹다가 배가 부르지 않다면 치즈 호떡도 맛보고 싶어졌는데

그만 미련을 버리고 돌아선다.

서울에서도 유명한 남대문시장 호떡을 줄을 서서 먹지 않았으면서 포항에서 호떡을 먹는 내 모습이 갑자기 우습다.

 

 

 소화도 시킬 겸 시장을 돌다가 수제 어묵 한 봉지씩을 사서 배낭에 넣고 발길을 돌린다.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또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해파랑길 안내지도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며칠 전 오던 날처럼 역시나 준비가 안 되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목 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결국 포항시청까지 찾아가기로 했다.

고문님께서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하시더니 거리가 1km라고 하신다.

그러면 걸어가도 되겠는걸.

아뿔사! 1km가 왜 이리 멀지?

철로를 넘어가는 고가도로로 올라가서도 한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직선거리가 1km였단다.

 

 포항시청 관광과 직원은 해파랑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익히 짐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힘들게 찾아갔는데 성의가 없어서 실망했다.

포항은 해파랑길 아니어도 찾는 사람이 많으니 상관없다는 투였다.

하기는 포항 12경이라고 정말 갈 만한 곳이 많기는 하네.

해파랑길 지도 총 3부 중 2부를 얻어서 돌아섰다.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와서 잠시 쉬고 오후 3시 40분 버스에 몸을 싣는다.

눈을 감고 나니 점점 부산이 가까워짐을 확실히 느낀다.

앞으로 세번 정도 더 일정을 잡으면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도착하겠지.

대장정이 손에 잡힐 듯한 기분에 고무되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하다.

버스는 잠깐 씽씽 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