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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

솔뫼들 2011. 8. 18.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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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소진의 '정의공주'라는 소설을 읽었다. 훈민정음 창제에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의 역할이 컸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었다. 우리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말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집현전 학사들의 힘이 컸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세종의 자녀들이 함께 노력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전에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작품에서는 벙어리 소녀를 통해 음운학을 연구한 세종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확실히 세종은 스스로 연구를 하여 음운학에 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가 보다.

 

 세종은 여러 면에서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한 현명한 군주였다. 늘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자녀들의 도움을 이끌어내지 않았나 싶다. 최만리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밀리에 한글 창제를 위해 역량을 모은 임금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히 우리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체계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지방에는 '가림토'라는 문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이두나 향찰을 완벽하게 해석하지 못 하는데 무지렁이 백성들이 이두를 배우기는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러기에 우리가 하는 말을 문자로 옮기는 방법이 구전처럼 전해져 오고 바위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니 어디까지 事實인지는 모르지만 참신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가림토를 기본으로 우리 말에 어울리는 문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실의 노력이 손에 잡힐 듯하다.

 

 작품은 정의공주가 한글을 만들기 위해 언어에 대해 공부를 하는 과정과 더불어 결혼 후의 생활이 나온다. 정의공주의 남편으로 나오는 안맹담은 술과 여자 문제로 정의 공주의 속을 무던히 썩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가출을 통해 정신을 차리고 나중에는 세종과 더불어 불교를 논할 정도로 마음을 비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안맹담이 자신의 부인인 공주가 한글 창제에 공이 큰데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기록에 남지 못하자 자신이 집안에 남은 만한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그래서 아들과 더불어 작성한 '죽산안씨대동보'에 그 기록에 남아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여자(정의공주)가 만들고 여자가 쓴다고 해서 '암클'이라고 불렀다는 대목에서는 사대부들의 좁은 소견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러니 세종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생각해 보면 세종은 가족적으로 그리 행복한 임금은 아니었던 듯하다. 세자인 문종이 약했고 그래서 며느리 둘을 내쳤으며 단종을 낳은 세번째 며느리는 바로 세상을 떴다. 큰딸 정소공주는 더 일찍 세상을 떴다. 그리고 본인이 형 양녕을 제치고 왕이 되었기에 늘 수양이 文武를 겸비한 것에 신경을 썼다. 세종 사후 일이기는 하지만 문종이 단명했고 세종이 그리도 염려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수양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으니 세종이 생전 염려했던 일이 아니던가. 그것을 끝까지 남아 목격해야 했던 정의공주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남편을 여의고 동생 수양보다 장수한 것으로 나오는데 수양의 아들인 조카 성종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때로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삶을 살았던 여인이자 한글 창제 그 중에서도 문장을 완성하는 것에 공을 세운 영민한 공주로서 정의 공주를 재현해낸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역사 속에서 사라져갈 인물들을 살려내 독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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