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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 둘째날 - 한라산둘레길 동백길에서 (3)

솔뫼들 2025. 3. 2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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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1시 25분, 갈림길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올라가면 윗세오름을 거쳐 백록담에 갈 수 있다.

10여년 전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을 때 여기가 그 무렵 개방된 코스라 하여 이 코스로 한라산 등산을 한 적이 있다.

가다가 적설량이 많아 통제되기는 했지만 힘들게 러셀을 하면서도 즐겁게 걸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려가면 된다.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가는 길도 꽤 멀다.

억새가 우거진 길도 기억이 나는군.

노루가 멀뚱멀뚱 눈 쌓인 길을 헤치며 산을 오르는 우리를 바라보았었지.

 

돈내코 탐방안내소를 지나 도로로 내려섰다가 묘지가 이어진 길로 들어선다.

혹시나 비를 피할 곳이 생겼나 하고 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탐방 안내소도 조용해서 그저 얼른 우리 차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내려가는 길도 비에 젖어 미끄럽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하면서 걷는다.

그래도 가는 길에 여유를 찾는다고 길 옆에 핀 동백꽃을 찾아 본다.

드문드문 꽃이 피어 있다.

산 아래쪽에 드물게 꽃이 핀 걸 보면 산중에는 꽃이 아직 안 핀 걸 수도 있겠네.

 

 30여 분 지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는데 금방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지나가는 곳을 보니 우리 차가 있는 곳이랑 거리가 너무 멀다.

몇 번을 갈아타야 가능할 것 같으니 버스 시간이 맞는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네.

 

 

 정차해 있다가 출발하는 버스가 우리를 보고 클랙션을 울려 알은 척을 하는데 손을 내저어 안 탄다는 의사 표시를 하고는

친구가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처음에 카카오택시를 호출했을 때는 거절이 뜨고, 다음에 연결이 되었는데 15분쯤 기다려야 가능하다는 답이 왔단다.

이 상황에서 추위에 떨고 있기는 하지만 조금 기다린다고 해도 택시가 여기까지 오면 감지덕지할 일 아닌가.

 

 택시를 기다리는데 몸이 와들와들 떨린다.

여름이어도 비를 많이 맞으면 추운데 지금은 겨울과 봄 사이.

몸이 거의 다 젖은데다 등산화 속까지 물이 들어가서 컨디션이 정말 최악이다.

저체온증에 걸릴까 제 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린다.

 

 20여 분 기다려 택시가 왔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기사에게 와 주어서 도리어 고맙다고 하니 이 비를 맞고 걸었느냐고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다.

사람이 거의 안 다니는 산길에서 무섭지는 않았느냐, 연세도 있어 보이는데 10km 넘는 길을 우중에 걷고 괜찮느냐 등등.

연달아 질문이 날아온다.

 

 연세는 무슨?

우리는 연세 같은 것 안 키운다고 농담으로 받으며 피식 웃었다.

날씨만 좋았다면 계속 걸을 수도 있었는데 아쉬울 뿐이지.

70대 중반이라는 기사는 자기도 한때 산에 열심히 다닌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 놓는다.

 

 육지에서 은퇴를 한 후 제주도에서 펜션을 하면 돈을 많이 번다는 아들의 말에 퇴직금을 몽땅 투자했다가 죽어라 고생을 하고 돈만 날렸단다.

펜션을 하는 동안 부인과 아들은 나 몰라라 하고 결국 혼자서 청소까지 도맡아 하느라 팍삭 늙어 버렸다고.

겨우 펜션을 팔고 늘그막에 개인 택시 기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무오 법정사에 도착했다.

 

 

 택시를 보내고 우리 차에 오른다.

얼른 호텔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씻고 몸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내비가 안내를 하는데 1100도로 옆으로 눈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도로에도 눈을 치우지 않았으면 통행이 불가능했겠다.

기온이 올라가도 산중이고 그늘이니 눈이 그대로 쌓여 있네.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안개는 남아 있는데 비는 내리지 않는다.

역시 비가 산중에만 내렸나 보다.

차에서 내려 짐을 정리하면서 보니 친구 스틱이 없단다.

택시에 두고 내린 모양이다.

카카오택시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니 친구는 한번 수리를 했고 한참 썼으니 미련이 없다고 한다.

제주도에 스틱 기부하고 가는 셈이다.

 

 호텔에 들어가 얼른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살 것 같다.

씻고 나니 배가 고프다.

비를 맞으며 걷느라 진을 뺐는데 점심을 김밥 한 줄로 때웠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도넛과 배낭에 가지고 다니던 스프를 꺼내어 먹었다.

 

 호텔방에서 젖은 옷에 배낭, 신발을 처리하는 것도 일이다.

몸이야 씻으면 간단히 되지만 등산화는 쉽게 마르지 않아 특히 골치 아프지.

여분의 신발이 없으니 저녁을 먹으러 나갈 때까지 가능하면 습기를 줄여야 하는데...

노르웨이에서 우중 트레킹 후 했던 것처럼 신발 깔창을 빼낸 후 두루말이 휴지를 신발에 넣고 물기를 어느 정도 제거한 다음 헤어 드라이기로 말린다.

아예 현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등산화 말리기 작업에 돌입하는데 이것도 꽤나 번거롭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친구와 번갈아가며 1시간여 등산화 두 켤레와 씨름을 해서 신을 만하게 되었다.

내 등산화는 천으로 되어 그나마 나은데 친구 등산화는 가죽이라 더 안 마른다.

그것도 시간이 약이겠지.

 

 오늘 세 번이나 넘어진 친구의 몸 어딘가에 상처가 나거나 멍이 들었나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강이에서 계속 피가 흐른단다.

일회용 밴드를 이용해 지혈을 하려도 해도 소용이 없네.

생각보다 깊게 바위에 부딪힌 모양이다.

친구는 피가 멎고 염증만 안 생기면 된다고 하는데 그래도 조심을 해야지.

저녁 먹으러 나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약을 사서 발라야 할 것 같다.

 

 오늘 雨中 트레킹을 하느라 고생을 해서 내일 날씨가 맑는다고 해도 트레킹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일 무얼 할까 새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기예보에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하니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친구와 일단 내일 오전에 제주 현대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현대미술관이 있는 저지 주변에는 갈 곳이 많으니 오후 일은 그때 다시 결정하기로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 위해 비가 내리나 창밖을 내다 보니 바람만 거센데 바닷가에 한 사람이 왔다갔다 한다.

찌푸린 하늘, 해변에 선  한 사람, 그리고 바다가 만들어내는 풍광이 멋져서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저 사람은 이 험한 날씨에 바닷가에서 혼자 바람을 맞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옷을 챙겨 입고 음식점을 찾아 나간다.

거칠게 부는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바닷가에는 걷는 사람이 많다.

젊음이 그래서 좋은 것이겠지.

우리는 오늘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텔레비전에 나왔다는 갈치조림 전문 음식점을 찾았다.

사람들이 꽤 많고, 유명인들이 다녀갔다는 종이도 벽에 많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는 건 가격에 비해 그리 탐탁하지 않다.

갈치는 생각보다 가늘고, 다른 반찬도 썩 맛나다고 할 수는 없네.

이름값을 못 하는구만.

그래도 점심을 제대로 못 먹었으니 허겁지겁 밥을 먹고 다시 호텔로 들어온다.

 

오늘은 피곤해서 아무래도 일찍 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배가 살살 아프더니 급기야 화장실에 뛰어가야 할 상황이다.

배탈이 난 것이 분명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래?

친구가 뭘 잘못 먹었나 보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텔에 들어와 먹은 스프가 문제였구나 싶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걸 먹었는데 보나마나 유통기간이 한참 지났을 것이다.

이래저래 기운이 없다.

친구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