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 보니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이곳에 하치마키 도로를 만들던 흔적이 남아 있단다.
착암기 구멍이 9개 확인된다고 한다.
제주에는 특히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진지를 비롯해 일제와 관련된 흔적들이 참 많다.
역사의 현장을 지나면서 우리가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조금 더 가자 이번엔 4.3 주둔소가 나온다.
여기는 우리끼리 싸운 흔적 아닌가.
제주도는 이래저래 참 아픈 흔적이 많은 곳이구나.
계곡을 몇 번이나 건넜는지 모르겠다.
계곡을 건너는데 좀 위험한 곳도 있었다.
친구가 계곡을 건너다가 바위를 잘못 딛어 또 넘어졌다.
동백길 입구에서 한번 넘어지고 난 후 너무 긴장을 하고 걸어서 힘들다고 하더니만 또 미끄러진 것이다.
친구가 넘어질 때마다 내가 더 놀라는 것 같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친구는 다치지는 않았단다.
그래도 넘어진 충격으로 내일 어딘가 멍이 들고 뻐근할 수도 있겠는 걸.
한라산둘레길은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길이 어딘가 싶을 때는 어김없이 줄을 띄워 헷갈리지 않게 해 놓았다.
사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으면 숲길은 금세 자취를 감추곤 하지.
동백길은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계곡을 여러 번 건너기도 하고, 솔잎이 깔린 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조릿대가 펼쳐진 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당연히 동백나무가 줄지어 있는 길도 있지.
가다가 동백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진 걸 발견했다.
아하! 동백꽃이 진 거였구나.
비록 시든 꽃이지만 반가웠다.
그래서 사진 한 장 찰칵!
길인지 계곡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구간에는 바위가 입은 이끼옷이 작품이다.
정말 설치미술 작품에 손색이 없다.
안개가 부옇게 낀 공간에 나무와 바위, 그리고 이끼가 들어내는 분위기가 몽환적이라 가다가 여러 번 발길을 멈추게 된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겠지.
이런 원시림이 영원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자연이 망가지는 건 대부분 사람들 때문이니 사람이 덜 다니면 되겠지.
오늘 우리가 걷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 했으니 그렇게 유지될 수 있을 거라 믿어 본다.
이제 동백길을 반 넘게 걸어 치유의 숲으로 들어섰다.
전에 치유의 숲에 왔을 때 가장 긴 코스를 골라 시오름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널찍한 길로 들어섰을 때 앞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싶었더니 조깅을 하는 여성이 달려온다.
날씨에 상관없이 자신이 만든 습관을 지키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도 대단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오름 삼거리 도착 전에 안개비처럼 내리던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친구는 판초 우의를 입고, 나는 스틱을 접어 넣고 우산을 편다.
흐르는 것이 땀인지 빗물인지 모르는 채로 발만 움직이는 시간이다.
치유의 숲을 걷고 있을 때 앞에서 오는 여성 트레커 세 명을 만났다.
그들 중 한 명이 우리 보고 '추억의 숲길'을 걷고 있느냐고 묻는다.
'추억의 숲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숲길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런 이름의 숲길이 동백길과 겹치는 모양이네.
그들과 헤어져 내처 걷는다.
친구는 아까 간식을 안 먹더니 배가 고프단다.
12시가 가까워 오니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편백숲 쉼터가 있다는 이정표를 보고 쉴 데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 걷는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지붕 없이 평상만 놓인 곳이었다.
하는 수 없지.
물에 빠진 생쥐꼴로 서서 겨우 우산을 받치고 김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다.
그래도 싸온 한라봉까지 챙겨 먹고.
그런데 살짝 바람까지 부니 우산을 써도, 비옷을 입어도 바지가 젖는다.
거리가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오늘 동백길만 걸으라는 말이구나.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이재무의 < 길 위의 식사 > 전문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면 좋으련만 우중충하게 안개만 자욱하다.
그래도 나무가 이렇게 우거진 건 좋은 일이지.
꽁꽁 몸을 싸매기는 했지만 건강한 기운이 몸에 깃든다고 생각하면서 편백나무 사이를 올려다본다.
김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잠시 쉬고 있는데 우리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남녀 네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연령대도, 차림새도 제각각이다.
이런 날씨에 걷는 사람들은 트레킹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우중에도 열심히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본다.
제주 주민인지 점심으로 싸온 음식도 다양하고 푸짐하네.
어떤 음식이든 빗물에 말아먹는 모양새가 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주섬주섬 배낭 정리를 하고 다시 길로 나선다.
손이 시려워 사진 찍는 것도 쉽지 않다.
스마트폰에 물이 들어갈까 신경도 쓰이고.
아무 생각 없이 걷자고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앞에 무슨 건물이 보이는군.
용도가 뭐였을까?
대피소였는지 지붕에는 작동하지 않는 것 같은 태양광 패널이 달려 있는데 덩굴식물이 온통 지붕을 덮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런 시설도 없고 사방에 뻥 뚫린 사각형의 구멍만 있다.
뚫린 구멍은 창문이었겠지.
네 방향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돌아가며 사진에 담고 발길을 옮긴다.
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변을 둘러보면 감탄이 나온다.
바위와 고사목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광이 가히 절경이군.
뼈만 남은 동물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모양 같기도 하고, 나무와 바위가 공생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길을 걸으며 동백길은 다음에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는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계곡을 앞서 갔다.
자세히 보니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섰네.
나는 제대로 길을 찾아가면서 돌아서 오라고 하니 이왕 들어선 것 그냥 갈 거라고 한다.
내가 계곡을 건너 먼저 숲길로 들어서자 친구가 스틱도 없이 넘어지지도 않고 잘 걷는다고 한 마디 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친구는 또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앞으로 고꾸러지는 바람에 목뼈를 다치지 않았을까 심각하게 걱정이 되었다.
친구는 자기도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단다.
다행히 목이나 허리는 괜찮다고 하네.
친구는 오늘 세번째 넘어졌다.
휴! 정말 이상한 날이다.
정신을 차리고 친구가 몸을 추스리기를 기다려 다시 걷는다.
걷다 보니 포장도로가 나왔다.
이 길로 쭈욱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길을 횡단해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한라산둘레길은 끝까지 산길로 이어지는구나.
등산화 안쪽까지 물이 들어가는 상황에 그나마 길이 평탄해 마음이 놓인다.
돈내코 탐방로까지 0.5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진짜 다 왔구나 싶다.
물이 조금씩 들어가던 등산화가 이제 푹 젖어 버렸다.
하기는 젖은 것이 옷과 등산화뿐이겠는가.
예상치 않은 봄비에 마음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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