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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피오르 트레킹 (11) - 폴게포나 국립공원 빙하 트레킹

솔뫼들 2024. 9. 2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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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느지막이 빙하 트레킹을 떠난다.

하루 '힐링'하는 마음으로 가면 된다고 하니 빙하 위를 걸으며 잠시 분위기를 즐기는구나 생각이 든다.

 

대형버스는 어제 떠났고 오늘은 택시로 이동한단다.

워낙 물가가 비싸다 보니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 모양이다.

 

 폴게포나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도 시선을 빼앗는다.

어제 내린 비로 빙하가 더 녹았을테고 곳곳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며 폭포며...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이기는 하지만 반영도 매혹적이다.

노르웨이는 그런 면에서 천혜의 멋진 풍광을 지녔구나.

노르웨이에 다시 한번 반하는 시간이다.

 

 

 전에 지중해 바닷가로 휴가를 떠나던 유럽 대륙 사람들도 기후 변화 때문에 여름이 워낙 더워지자 더위를 피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래저래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사람들이 몰리게 생겼군.

그러다가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오버투어리즘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하산시 날씨가 궂어 고민을 했는데 구름이 있기는 하지만 날씨가 좋다.

감사할 일이다.

빙하 위를 걸으며 비를 맞으면 컨디션이 얼마나 안 좋아지겠는가.

 

 드디어 포나 스키리조트에 도착했다.

지금은 스키장이 휴업중이지만 이곳은 여름에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스키장이 휴업을 할 때 빙하트레킹 체험을 원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을 하는 모양이다.

 

 

 리조트에 도착한 후 빙하트레킹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복장을 갖춘다.

자신의 발에 맞는 빙벽화를 선택해 신고, 비상시를 대비해 하네스라고 하는 허리벨트도 하고, 눈이 아닌 얼음에 최적화된 아이젠 그러니까 크램폰도 발에 장착한다.

머리에는 비니를 쓰고 그 위에 빨간 헬멧까지 친구와 맞춰 쓴 후 마주보고 웃었다.

완전히 전사 같구만.

 

 이제 인솔자 포함해 10명에 트레킹 가이드까지 해서 11명을 로프로 연결한다.

우리는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안전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죄수들이 줄줄이 묶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네.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걸으라 하지만  한 사람이 넘어지면 연쇄적으로 충격이 오리라.

 

 

 우리 일행이 어느 정도 연령대가 높아서인지 빙하 트레킹 가이드가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나이가 있어도 우리가 해외 트레킹을 다닐 정도는 되는데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어찌 되었든 일행들 사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라, 앞사람이 간 곳을 가능하면 그대로 따라 가라, 트레킹 도중 절대로 장갑을 벗지 말아라 등등 잔소리(?)가 많네.

 

 그래도 인상이 좋은 가이드를 보며 일행들은 연신 농담을 건넨다.

잘 생겼다는 둥, 톰 크루즈를 닮았다는 둥...

덴마크 국가대표 스키 선수 출신이라는 가이드는 덴마크에는 빙하가 없어서 노르웨이에 와서 일을 한단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인건비 비싼 노르웨이로 인력이 많이 유입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디어 빙하트레킹을 시작한다.

추위를 덜 타는 친구는 방한 자켓을 안 입어도 될 것 같다고 하더니만 빙하 위에 서더니 표정이 변했다.

얼음 위에 서 있으니 역시 다르다나.

주변이 다 얼음이니 기온이 영상이어도 손이 시리고 공기가 차갑다.

 

수천 년 밤낮없이

얼고 또 얼어도

그 속은 얼음이 아니라 물이더라

결국 세월 속으로

흐르고 마는

천 개의 하늘 천 개의 강물이더라

마냥 그 푸름이

말 못하는 냉가슴인 줄 알았더니

단 한 번의 눈길에

그냥 퍽 쏟아지고 말더라

못내 울다가

순간에 미치고 마는 사랑이더라

 

박태진의 < 빙하 > 전문

 

 

 앞사람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스키장이니 경사가 있어서 걷기가 쉽지 않다.

주렁주렁 달린 장비도 무겁기는 하고.

게다가 중간중간 빙하가 녹은 웅덩이나 크레바스에 빠지면 낭패이니 잔뜩 긴장을 했다.

기분은 '힐링'인데 몸은 중노동 아닌가?

 

 가다가 가이드가 서서 설명을 한다.

빙하가 녹아 물이 흐르는 곳이다.

물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이 빙하가 점점 녹고 있다는 말이겠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바로 앞에서 느끼게 되는군.

 

 모두 한 발 앞으로 가면 얼음이 무너질까 염려되어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섰다.

그리고 절박한 표정으로 빙하가 녹아 물이 흐르는 곳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도 내년에는 물이 흐를지 모르지.

 

 

 멀리 빙하를 줄지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급경사를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네.

우리는 양손에 스틱을 잡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피켈을 쥐고 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노르웨이에 와서 우리 뜻과는 다르게 경로우대를 당하고(?) 있는 셈인 것 같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분이 언짢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안 미끄러지려고 스틱을 짚을 때 힘을 주어 그런지 어깨가 뻐근하다.

다리는 이틀 내리 걸은 후라 그런지 별 느낌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전신운동이 되는 셈이다.

 

 올라가는 길이 정해진 건 아니고 팀의 컨디션에 따라 가이드가 정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급경사로 바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빙빙 돌아서 올라간다.

씽크홀처럼 위에만 얼음이 있고 아래쪽은 뻥 뚫린 곳이 있으니 조심해야겠네.

가이드가 선두에서 피켈로 얼음을 두드리는 이유가 있었구만.

 

 

 

  가다가 크레바스를 만났다.

얼음 사이가 심하게 갈라져 있다.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 보인다.

모든 소음을 삼킬 정도로 아래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크고.

살짝 들여다보는데 두려움에 머리끝이 쭈뼛 한다.

갈라진 부분이 아름다운 비취색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괴물 같다고나 할까.

 

 자칫 실수로 크레바스에 빠질까 조심조심 크레바스를 건너 뛴다.

일행 모두들 굳은 표정이다.

 

'크레바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작가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가 기억난다.

우리나라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 도중 크레바스에 빠져 생사를 오갔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 삼아 쓴 작품이다.

그때 크레바스에 빠지면 둘 다 죽지 않기 위해 로프로 연결된 파트너가 로프를 잘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어찌 되었든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구사일생 살아남는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수십 년 산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지.

 

 

 온 몸에 힘을 주고 걷다 보니 몸에 살살 열이 오른다.

모범생처럼 장갑도 못 벗었는데 일행 중에 슬금슬금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이네.

나도 슬그머니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어 본다.

내가 여기 또 올 일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설령 또 온다고 해도 이런 풍광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겠지.

 

 하늘이 흐려질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파란 하늘에 높은 구름이 떠 있다. 

빙하 위에 서서 완전 군장(?)을 하고 높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이 기분이란...

모든 걸 다 가진 듯 벅차다.

정말 특별한 체험이 되겠군.

 

 사방이 단지 희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무념무상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