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비에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배낭을 내려놓고 무얼 먹을 엄두도 안 난다.
가다가 산장이나 카페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제는 등산화에도 물이 들어가기 시작해서 '찌걱'거린다.
아무리 좋은 방수 등산화라도 이런 날씨에는 소용이 없지.
조금 일찍 등산화에 물이 들어간 인우씨나 나나 매한가지네.
오래 전 육십령에서 무주 구천동까지 덕유산 종주를 할 때 종일 세찬 비를 맞았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비는 순식간에 옷은 물론 등산화 속까지 적셨다.
나중에는 물을 건널 때도 등산화를 신은 채로 첨벙첨벙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될 정도였다.
거기에 안개가 끼는데 앞사람, 뒷사람과 거리는 멀어지고 휴대전화가 불통이라 연락도 안 되어
공포에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지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한여름에도 악천후를 만나면 저체온증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았지.
오늘 역시 비슷한 경우이다.
종일 비에 젖은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발은 보나마나 등산화 속에서 퉁퉁 불었을 거다.
그나마 나는 큰 산이라 생각해서 배낭 아래쪽에 보온용도의 옷과 장비를 준비했는데
준비가 안 된 친구들은 더 고생을 한다.
본인이 미처 준비를 안 하고 미리 이야기를 안 해 주었다고 애꿎은 가이드 탓만 하고 있는 걸 들으니
안타깝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무작정 때리다보면
지구라는 이 목탁도 언젠가는 텅텅 소리가 날 테지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철썩' 마지막으로
목탁 한번 치겠다는 것이
전혀 어불성설은 아니지
빗방울이 연습 삼아 사람들 목 위의
목탁을 먼저 쳐보는 것은
지구를 쳐볼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서지
비 오는 장날을 걸어다니다가
머리 위, 비닐에 묵직하게 고인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본 적 있지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앗'하는 목탁소리가 터져 나오더군
빗방울이 때리면 뭐든지 목탁이 되고 마는 것
그게 삶, 아니겠어
소리를 내기 위해 물렁해지는
저 땅을 좀 봐
새싹이 목젖처럼 올라오는 것. 보여?
멍 자국이라는 듯 쑥쑥 키를 키우는 저것
소리의 씨앗인 빗방울 속에서 자라는
저 푸른 목탁소리
이동호의 < 비와 목탁> 전문
멀리 건물이 한 채 보이는 것 같다.
희망을 갖고 걸어야지.
그런데 가이드 비가 움직이는 곳은 그곳과 방향이 다르네.
조금 늦어져도 산장에서 몸을 녹이고 가면 안 될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어쩌랴.
길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이고 정해진 코스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추위에 떨어서 그런지 사람들 걸음이 더 빨라졌다.
고문님께서 뒤에 오시기도 하고, 나만 빨리 간다고 혼자 호텔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가이드 비는 자신을 앞질러간 사람들을 목청껏 부른다.
일행이 모두 모였을 때 자신보다 앞에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리고는 장갑과 치마에서 물을 주루룩 짜내고는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나도 함께 웃어 준다.
내 장갑도 마찬가지인걸.
점심 시간도 지나간다.
아무도 어디에서 점심 먹자는 소리도 없다.
이 날씨에 어디에 무얼 펼쳐놓고 먹을 것인가.
배는 당연히 고프고 지쳐서 다리도 무거워졌는데 얼마나 더 걸어야 하지?
꾸준히 내리는 비로 주변 계곡은 물이 불어 굉음을 내며 흐른다.
우당탕 퉁탕 소리내며 흐르는 빙하 계곡을 보면 두려움이 느껴진다.
한 나절 내린 비로 이렇게 추위에 떨고 절절 매고 있으니 광대무변한 자연 앞에서 사람은 얼마나 왜소하고 초라한가?
바위 봉우리에는 하얀 실금이 죽죽 그어졌다.
어두운 빛깔의 바위 곳곳에 새겨진 물길이 자연스러운 무늬처럼 느껴진다.
어느 정도 산에서는 내려온 느낌이다.
체온이 떨어져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인다.
추워서 죽을 것 같다는 소리를 해대던 4명 중 두 여자 친구도 다시 사진을 찍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아무데서나 목소리 높이는 전형적인 '한국 아줌마'이다.
그나저나 이 등산화를 어쩐다?
오늘은 어차피 이리 되었지만 내일은 멀쩡해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 보건대 날씨가 활짝 갤 것 같지도 않고, 호텔에 들어가 한 나절 말린다고 다 마를 것 같지도 않으니
난감한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 의견을 들어본다.
보통 가장 단순한 방법이 신문지를 넣어 물기를 흡수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 이야기가 쇼핑을 할 수 있으면 새로 한 켤레를 산다.
집에 등산화가 종류별로 쌓였으니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다음으로 호텔에 헤어 드라이어가 있으면 그것으로 말린다.
희망사항이다.
다음으로 헤어 드라이어가 없으면 헤어 드라이어를 사서 사용하고 가져간다.
그 다음 나온 의견이 코인을 넣고 사용하는 세탁소가 있으면 이용한다.
관광객을 위해 그런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 역시 우리의 바람일 뿐이다.
일단 내려가 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니 더 고민하지 말자.
하늘도 멀개지고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오후 1시까지 카페가 있는 곳으로 차가 온다고 했다나.
일찍 내려가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했으니 이제 사진이나 찍을까?
雪峰 근처로 올라가는 구름들은 우리 모습을 한가롭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야속한지고.
그래도 무사히 내려왔으니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추억이 되겠지.
雲霧가 만들어낸 경치가 근사해서인지 모두들 목소리가 조금은 밝아졌다.
금방 신선이라도 나올 것처럼 꼬리를 물고 올라가는 안개를 바라보며 오늘 내가 무엇과 싸웠나 돌아본다.
날씨가 아니고 나 자신이었구나.
누가 그랬던가.
나쁜 날씨는 없다고.
준비 안 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오후 1시경 카페에 도착했다.
옹기종기 서서 따뜻한 음료를 시키면서 차를 기다린다.
몸을 데우는게 급선무이니까 핫쵸코를 시켰는데 정말 혼자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이 좋다.
다른 사람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두 손으로 따스한 컵을 잡고 홀짝인다.
스위스가 카카오 가공기술이 뛰어나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마시는데
차가 왔으니 먼저 갈 사람은 타란다.
음료를 다 못 마셔서 다음 차로 간다고 하고 기다리는데
실내에서 따뜻한 것을 마셔도 몸이 풀리지 않는다.
감기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겠는걸.
앞차로 가지 않은게 후회될 정도로 몸이 덜덜 떨린다.
옷 속으로 빗물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온도 차이로 습기가 찬게지.
사방에서 뿌리치는 폭우를 그리 오래 맞았으니 어떻게 멀쩡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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