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가자 해파랑길 안내판이 나온다.
아직 10코스가 끝날 때는 안 되었는데 이상하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에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자상하기도 하지.
드디어 경주 구간을 끝내고 울산으로 접어들었구나.
다시 해변을 따라 걷는다.
비슷한 횟집과 해산물 가공공장과 어촌이 이어지는 길이다.
기기묘묘한 바위가 눈길을 잡아끌고 자꾸 카메라를 만지게 만든다.
사실 지치면 사진도 싫고, 구경하는 것도 관심 없고, 그저 기계적으로 다리만 움직이는데
주변 풍경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힘을 내어 바위를 눈여겨 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걸어본다.
오는 내내 이정표에서 보았던 강동화암 주상절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강동화암 주상절리는 우리나라 특히 동해안에서 나타나는 주상절리 중 용암 주상절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어 그 가치가 인정된다고 한다.
주상절리의 횡단면이 꽃무늬를 보여주어 '花巖' 마을에 대한 유래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안내문을 읽고 주상절리를 찾아본다.
기대를 해서 그런지 양남 주상절리에 비해서 그 규모가 작아서 실망이 된다.
안목이 없는 내 눈이 주상절리의 가치까지 알아볼 수는 없고.
이어진 해변을 따라 걷자니 몽돌을 반출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보인다.
굉장히 위협적인 문구로 작성이 되었지만 사실 몽돌해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안내문이다.
그만큼 집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겠지.
오래 전에 나도 검은 몽돌을 처음 보고는 신기해서 주워 온 적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가져가지 말라는 안내문이 있었던 것 같다.
집에 가져다 어디에 놓을까 하다가 책장 앞에 놓았다가 다시 화분에 올려 놓았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후 다시는 몽돌을 집어오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순간적으로 예쁘다고 주머니에 넣지만 한두 개 가져다 그리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나 하나쯤이야 생각한다면 전국 몽돌 해안에 몽돌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몽돌 해변을 지날 때마다 그때 생각을 하며 반성을 하게 된다.
해변과 멀지 않은 곳에 도로가 지나가고 길은 이제 그곳으로 안내를 한다.
주변 풍경과 다르게 갑자기 고층건물이 불쑥 나타난다.
고층아파트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다.
바닷가에 신도시가 하나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새로 짓는 대단지 아파트도 있고, 그 옆으로 길도 새로 만들고 있어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요즘은 복잡하고 공기 안 좋은 곳보다 환경이 좋은 곳을 선호하니 인기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비록 지나는 사람 눈에는 고층아파트가 나즈막한 기존 건물,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볼썽사납지만.
고층아파트 단지가 생겨나자 거기 맞추어 세련된 외관을 자랑하는 커피전문점이며 카페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누가 먼저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하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앞다투어 생기는 상가들을 보노라니
몇 년 후에 오면 정말 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번쩍번쩍 하기도 하고, 쪽 빼입은 신사 같기도 한 숙박업소들도 줄지어 들어서 있고.
걷는 길 옆으로 인문학 서재 '몽돌'이라는 건물이 보였다.
한동안 인문학이 죽었다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니 최근에는 갑자기 인문학 강좌가 유행하고 있다.
그런다고 인간에 대한 관심이 금세 달라질 리 만무하건만 양은냄비처럼 달아오르는 우리 국민성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인간을 중심에 놓고 모든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해변에 세워진 인문학 서재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시간만 늦지 않았다면, 아니 이렇게 지치지만 않았으면 한번 들어가보고 싶은 공간이다.
이제 널찍하게 정자해변이 펼쳐진다.
어디쯤에서 일정을 접을까 고민을 하다가 저녁을 먹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친구가 추천한 정자항까지 가기로 했다.
정자항에 가면 활어시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싱싱한 회를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억지로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간다.
정말 내 다리가 내 몸에 붙어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오후 7시 30분, 불이 휘황한 곳에 도착하니 어시장을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어시장이 문을 닫을세라 얼른 들어가 우리가 먹을 만큼 회를 뜨고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온갖 채소와 초고추장을 주고 매운탕을 끓여주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뻗자 아무 생각이 없다.
아니 먹는 것보다 그저 눕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래도 먹어야겠지.
이름도 모르는 자연산 생선회를 먹고, 매운탕도 챙겨 먹고, 피로 풀리라고 소주도 한 잔 마시고...
그런 다음 식당 주인에게 근처 깨끗한 숙소를 추천해 달라고 하니 경주 방향으로 가야 한단다.
도저히 거꾸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하니 건너편을 가리키면서 깨끗하기는 한데 오래 되었다고 하네.
아이고, 더 이상 가릴 것도 없다.
10분쯤 걸어야 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소화도 시킬 겸 걷자고 마음 먹는데
우리가 측은해 보였는지 마음 좋은 식당 주인이 차로 데려다 주겠단다.
사양하고 길로 나선다.
길 옆으로 휘황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걸 보니 여기도 온통 대게 천국이다.
울진에서 영덕을 거쳐 포항, 경주, 울산까지 대게가 헤엄쳐 왔군.
대게 덕분에 동해안 지역들이 겨울을 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불빛 환한 거리를 지나자 길은 항구로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길을 가로등에 의지해 걷는데 길 한 켠으로 해파랑길 안내판이 보인다.
인증하는 기념으로 한 장 찍고 쉴 곳을 찾아 걷는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의 < 푸른 밤 > 전문
오후 8시 30분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씻는 것조차 귀찮지만 비도 맞았고 땀도 흘렸는데 어찌 그냥 누울 수 있나.
짐은 내일 아침에 정리하기로 하고 얼른 씻는다.
그런 다음 아무 생각 없이 눕는다.
경주 감포에서 울산으로 넘어오기까지 오늘 무려 37km 걸었다.
아마도 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가장 긴 거리를 걸은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자다가 내 코 고는 소리에 내가 깨지 않을까 몰라.
고단한 내 몸에 죽음과도 같은 휴식이 주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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