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임실 여행기 4 - 국사봉 물안개

솔뫼들 2024. 12. 1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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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방이 안 되고 전기담요를 깔고 잠을 자야 해서 방 안 기온이 오락가락 했지만 그런 대로 아침을 맞았다.
오전 7시도 안 되었는데 친구가 그만 일어나잔다.
옥정호 물안개 보러 8시까지는 가야 한다면서.
 
 세수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은 다음 숙소를 나선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으니 운전은 조심해야겠지만 물안개는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군.
 
 국사봉 전망대 주차장을 내비에 입력하고 가는데 내비는 어제 온 길과 다른 길로 안내를 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기에 운전하기 편한 길로 안내하는 것 같다고 하니 친구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것 아니냐고 구시렁거린다.
요즘 T맵이 제정신이 아니기는 하지.
횡성호수 갈 때 내비 따라 가다가 양재동을 한 바퀴 도는 어이없는 일을 겪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여러 번 말해 보아야 공연히 서로 부딪칠 뿐이니 일단 내비를 믿어 보자.
처음 오는 낯선 곳에서 주변 지리를 전혀 모르는데 방법이 있나.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던 차량이 구부러진 길로 접어드니 어제 보던 풍경이 나타난다.
오늘은 내비가 제정신이네.
 
  國士峰은 잿말 출신 선비 12명이 그 산의 정기를 받아 진사 벼슬을 했다는 의미로 '선비 士'자를 쓴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국사봉이라는 이름에는 대부분 '스승 師'나 '생각 思'를 쓰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 했더니만 그런 스토리가 있었구만.
 
 오전 8시경 국사봉 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충전을 하려고 충전기를 끼우고 보니 스크린에 충전기가 고장이라는 안내문이 떴다.
비상전화를 하니 아직 근무시간 전이라 기계음만 들리고.
하는 수 없이 일단 충전기를 다시 빼려는데 아무리 들고 힘을 써도 안 되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두고 국사봉에 올라갔다 온 후 다시 해 보자고 하면서 산을 오르는데 친구는 계속 부정적인 소리만 골라서 한다.
계속 연락해도 충전기 설치업체가 쉽게 오지 않을 거다, 내일이나 되어야 충전기가 고쳐질지 모르겠다는 둥.
그러더니만 자기는 저녁에 약속도 있고 내일 근무를 해야 하니 문제 해결이 안 되면 오늘 버스를 이용해 서울로 간단다.
그런 상황이 되면 그래야 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자꾸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니 짜증이 난다.
기차도 있으니 잘 타고 올라가라고 하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아무 말 없이 국사봉 전망대를 향해 오른다.
시작부터 꽤 가파른 계단길이다.
10분 정도밖에 안 오른 것 같은데 전망대가 나온다.
그런데 한 발 늦었다.
전망대 사진 찍기 좋은 곳에는 이미 사진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옥정호는 뽀얀 설렁탕 빛깔이고.
조금 기다려야겠군.

 
  사람들이 많아 옥정호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전망대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정상까지 가는게 낫겠다 싶어 방향을 틀었다.
친구는 휘익 가 버렸고 기분이 언짢아 말을 하기 싫은 나는 천천히 올라간다.
안전장치도 되어 있고 길은 잘 나 있지만 경사가 급하고 주변은 생각보다 험하다.
국사봉 정상(475.2m)에 도착하니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친구가 묻는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정상석 옆에 서라고도 하고.
나는 묵묵부답.
기념으로 정상석 사진만 한 장 남기고 우리만 있는 국사봉 정상에서 옥정호를 내려다본다.
 
 슬슬 옥정호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붕어 모양의 출렁다리 주탑도 보이고 근처 산들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어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이런 풍광 얼마만인가.
풍덩 구름바다에 빠져 헤엄이라고 치고 싶다.
약간의 수고로움이 안겨준 선물이 감동적이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내려가야겠지.
10여 분 시나브로 변해가는 옥정호 풍광에 젖었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겹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게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류시화의 < 물안개 > 전문
 

 
  내려가는 길에 보니 새삼스레 길이 불친절하다.
주차장이 이렇게 멀었나?
빠른 걸음으로 전망대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해가 성큼 올라왔다.
물안개를 붙잡아둘 수 없으니 마음이 바쁘겠지.
 
국사봉 정상까지 다녀오는데 1시간쯤 걸렸다.
사실 지금 산불방지기간이라 등산이 금지되어 있다.
산도 산이지만 옥정호 물안개를 놓칠세라 임실군청에 전화를 해서 이메일로 어렵게 입산허가서를 얻었다.
화기는 없지만 만에 하나 산불감시요원이 있을 수도 있으니 입산허가서를 준비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망대까지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모양이네.
 
 본래 어제 국사봉과 오봉산 4봉, 5봉을 아울러 타려던 계획이었는데 도로 사정으로 임실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계획이 바뀌었다.
오늘 붕어섬을 방문하려면 본격적인 산행은 포기.
국사봉 맛만 본 것으로 만족하자.
 




 주차장에 내려와 어찌어찌 해서 충전기를 겨우 뽑았다.
고장났던 충전기는 원격으로 고쳤는지 정상 작동중이고.
다른 쪽 충전기를 꽂고 급속 충전을 한다.
30~ 40분 충전하는 동안 간식도 먹고 어제 갔었던 國士亭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국사정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를 것이므로.
 
 국사정에 올라 말갛게 안개로 세수를 한 단풍 구경도 하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비질을 하다가 슬쩍 꼬리를 감추는 물안개도 말끄럼히 바라본다.
이것만으로도 임실 여행은 충분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다시 주차장으로 가서 완충이 되지는 않았지만 서울까지 갈 수 있겠다 싶어 충전기를 뽑는데 이것도 속을  썩이네.
친구가 용을 쓰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이리저리 돌리니 어이없게 쑥 충전기가 뽑혔다.
요령이 있나 본데 우리가 공연히 힘만 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