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오늘의 시- 솥 이야기

솔뫼들 2023. 12. 1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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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 이야기

                               황정산

 

솥이 있었다

파시평을 떠돌며 술장사를 하던

할아버지의 솥이었다

이 솥을 메고 다니며 할아버지는

데리고 있던 작부들 밥을 해 먹였다

육이오 전쟁통에 피난 갔던 아버지는

함포사격으로 무너진 집에 숨어들어

이 솥을 새끼줄로 엮어 들쳐메고 돌아와

솥은 아버지의 솥이 되었다

그 후 솥은 열일을 다하였다

밥을 짓고 엿을 녹이고 고기와 뼈를 달이기도 했지만

시래기와 수제비로 겨우 윤기를 보존하기도 했다

닳아 얇아지고 구멍이 난 솥은

땜장이의 손을 빌리기도 했다

눈썰미 있는 내가 양은 젓가락을 잘라

리벳을 만들어 때우기도 했다

금속의 물성을 알게 된 것은 이 솥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솥은 보이지 않았다

팔리거나 버려졌을 솥의 기억이 사라질 무렵

아버지는 중풍에  쓰러지시고

나는 아버지를 들쳐업지 못했다

그것은 내 일이었다

는 것을 아주 뒤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