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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 이야기
황정산
솥이 있었다
파시평을 떠돌며 술장사를 하던
할아버지의 솥이었다
이 솥을 메고 다니며 할아버지는
데리고 있던 작부들 밥을 해 먹였다
육이오 전쟁통에 피난 갔던 아버지는
함포사격으로 무너진 집에 숨어들어
이 솥을 새끼줄로 엮어 들쳐메고 돌아와
솥은 아버지의 솥이 되었다
그 후 솥은 열일을 다하였다
밥을 짓고 엿을 녹이고 고기와 뼈를 달이기도 했지만
시래기와 수제비로 겨우 윤기를 보존하기도 했다
닳아 얇아지고 구멍이 난 솥은
땜장이의 손을 빌리기도 했다
눈썰미 있는 내가 양은 젓가락을 잘라
리벳을 만들어 때우기도 했다
금속의 물성을 알게 된 것은 이 솥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솥은 보이지 않았다
팔리거나 버려졌을 솥의 기억이 사라질 무렵
아버지는 중풍에 쓰러지시고
나는 아버지를 들쳐업지 못했다
그것은 내 일이었다
는 것을 아주 뒤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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