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나와 박지도를 바라보니 언덕배기에 보랏빛 물결이 출렁인다.
아하! 저 꽃이 지금 축제기간이라고 현수막에 쓰여 있던 아스타꽃이로구나.
'아스타'는 고대 그리스어로 '별'을 뜻한다고 한다.
꽃말이 '믿는 사랑', '추억'이라고.
그래, 이번에 확실하게 추억 만들고 가는 거야.
박지도로 이어지는 퍼플교로 들어섰다.
사진 찍는 사람들을 피해 걷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사실 다른 사람이 내 사진 속에 슬쩍 들어와도 그러려니 해야 한다.
풍경 사진에도 엉뚱한 사람들이 툭툭 들어와 있고.
다리 중간중간에는 앉아서 다리쉼을 하거나 사진을 찍을 공간을 군데군데 마련해 놓았다.
나름대로 방문객들을 많이 배려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의자가 준비되어 있으면 한번 앉았다 가는게 예의겠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앞만 보고 달려갈 일인가.
무심코 걷다가 올려다보니 말간 하늘이 보인다.
종일 심통이 난 것 같던 하늘이 맑아지니 내 기분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사실 여행을 할 때는 날씨도 중요하지.
산도 그렇지만 특히 바다 근처를 여행할 때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울릉도에 갈 때 세 번 다 날씨 때문에 고생을 했었지.
배가 안 떠서 다음날 들어가기도 했고, 반대로 다음날 나오기도 했고, 오전에 나오려던 계획이 오후로 밀리기도 했고.
굴업도에서는 또 어땠나.
안개와 파도 때문에 여객선이 안 떠 다른 여행객들과 어선에 몸을 싣고 잠깐이지만 마음을 졸이지 않았던가.
내일도 배를 타는 일정이 있으니 부쩍 날씨에 신경이 쓰인다.
쉬엄쉬엄 걸어서 박지도에 도착했다.
박지도는 처음에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해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설, 또 섬 모양이 바가지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어떻게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건 사람들은 이제 신안 박지도 하면 그저 퍼플섬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아스타로 덮인 꽃밭으로 올라간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처럼 비어 있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보라색으로 온통 물들었다.
아스타꽃은 물론 공중전화 부스도 보라색이요, 철탑, 전신주도 보라색이다.
하긴 반월도에서는 쓰레기통도 보라색이었지.
아스타꽃 사이사이를 오가며 사진을 찍다가 우리가 다녀온 반월도와 바다를 내려다본다.
유리처럼 미동도 없는 바다에 아스라이 섬들이 비친다.
섬과 나무 몇 그루가 만드는 反影이 무늬가 되는 풍경.
잠깐 그 고요한 풍경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이다.
주변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수런수런하다.
우리도 꽃이 많은 곳을 옮겨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니 아스타 사이에 보라색 바람개비가 꽃처럼 서 있는 풍경을 만났다.
보라색 바람개비가 살살 돌아가는 풍경도 정답다.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해 준다고나 할까.
정말 놀잇거리가 없었던 시절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던 장난감이 바람개비였지.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바람 부는 방향으로 달리면 빙빙 도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보라색에 취해 한참 아스타 꽃밭을 거닐었다.
향기도 맡아보고, 보라색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 거는 시늉도 해 보고, 꽃 사이에 앉아 잠깐 꽃이 되어 보기도 하고...
요즘은 지역마다 꽃 축제를 많이 하지만 신안처럼 한 가지 색으로 한 지역을 상징하게 만든 곳은 없다.
이래저래 퍼플섬은 보랏빛 향기로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카페 차량도 보라색인데 카페 이름도 보라이다.
앙증맞은 차량을 보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작은 섬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박지도와 반월도에 전해 내려오는 '중노두 전설' 안내문에는 비구와 비구니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비구와 비구니가 서로 만나기 위해 박지도와 반월도에서 돌로 주워서 노둣길을 만들다 중간에 겨우 만났는데 밀물이 들어와 그대로 물에 잠겨 버렸다는 슬픈 전설이다.
비록 전설이지만 그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내가 건너온 다리[橋]를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이제 박지도에서 안좌도 두리로 가는 퍼플교로 들어선다.
역시 사람들이 많다.
이제 다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기는 했지.
퍼플섬에서 숙박을 하며 해넘이까지 보면 더욱 멋진 시간이 되겠지만 마음을 내려놓자.
한번쯤 와야지 벼르던 곳에 온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사랑하는 당신이여
당신의 그리움은 다시 안녕하신가요
보라색 날들이
다시 말을 걸어올지라도
그렇게 멀리 뛰어가지 말고
한 번쯤은 뒤돌아서서
애태움과 기다림의 간절함을
꽃의 순수함으로
다시 말을 걸어주십시오
이렇게 당신의 마음을 위해
생각을 덜어 놓을
생각의 그릇의 더러움과 찌끼를
다 씻어내고
진실의 모습만을
다시 넣어두었습니다
이렇게 꽃잎의 떨림과
입술로 말할 수 있다면
보라색의 마음은 기꺼이
처음날들의 고백을
거침없이 당신에게
다시 이야기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날들이에요
보라색의 가슴에 기대어
파랑새의 행복한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요
정세일의 < 보라색 날들이 다시 말을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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