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알람소리에 맞춰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몸이 고단하기도 한데다 새벽에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해 긴장을 했는지 숙면을 취하지 못 했지만 하는 수 없지.
오전 5시 40분까지 나오라고 했으니 서둘러야 한다.
짐을 정리해서 나가니 밖에는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에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하더니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구만.
그래도 산이 아니고 평지이니 우산을 들고 걸을 수는 있겠지.
압해도 송공항에서 병풍도 가는 배를 탄다고 했다.
오전 6시 40분에 가는 첫 배를 타는 모양이다.
12km에 이르는 '순례자의 길'을 걷기 위해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머리가 맑게 깨어나지 못 했는데 어스름이 깔린 바다도 뒤척이다가 부스스 깨어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약간 썰렁한 느낌에 몸을 움츠리고 승선을 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배가 아주 낡았다.
좌석이 마음에 안 들어 온돌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츰 바닥 온도가 올라가니 잠이 솔솔 오려고 한다.
생각보다 배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찼다.
섬이 그리 큰 것 같지 않은데 이 사람들이 다 내리면 인산인해 아닐까?
어제 퍼플섬 같이 약간 도떼기시장이 되지 않을까 살짝 염려가 된다.
그런데 한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떼로 몰려온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잠은커녕 정신이 사나워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무슨 ‘개똥철학’ 같은 소리를 그렇게 해대는지...
눈을 감고 얼른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먼저 내렸다.
우리가 내릴 병풍도도 그리 멀지는 않겠지.
드디어 병풍도에 내렸다.
병풍도는 마을 서북쪽의 산이 바닷물과 바닷바람에 오랜 시간 깎여서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염전과 논 농사, 새우 양식, 김 양식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예전에 염전 옆에 약효가 뛰어난 소금을 얻기 위해 맨드라미를 심었다.
그러다가 섬 인구가 줄고 농지가 황폐화되자 주민과 신안군이 그 자리에 맨드라미를 심어 공원을 만들었다.
세계 최대 맨드라미 공원이 탄생한 것이다.
이맘때쯤이면 다채로운 빛깔의 맨드라미가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루는데 코로나로 취소되었던 맨드라미 축제가 딱 이 기간에 열리고 있으니 우리는 우연히 복권에 당첨된 것 같다고나 할까.
어릴 적 보던 맨드라미는 누가 보아도 닭 벼슬같이 생겼다.
'맨드라미'라는 이름은 토박이말로 강원도 방언의 ‘면두’에서 유래해 ‘면두리’에서 ‘맨들’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꽃밭에서 볼 수 있는 맨드라미는 대부분 외래종 맨드라미 같다.
예전에 보던 닭 벼슬 모양이 아니라 촛불 모양을 하고 있고 색도 다양해졌다.
병풍도를 알리는 비석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빨갛고 노란 꽃들이 반겨주는 언덕배기를 향해 올라간다.
쌀쌀한 날씨에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등산 재킷 모자를 썼다.
우산을 쓸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면서.
드디어 맨드라미 공원에 도착했다.
저절로 눈이 크게 떠진다.
빨갛고 노란 맨드라미가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색깔이 선명할 수 있을까?
성경 속 12 사도상이며, 사진 찍기 좋게 만들어놓은 쉼터며, 공원 아래쪽의 붉은빛 지붕을 인 마을이며...
정말 멋진 풍경화 한 폭이다.
이쪽저쪽으로 오가면서 꽃 속에서 사진을 찍는다.
비가 좀 오면 어떤가?
가을비마저도 운치를 더해주는 느낌이다.
게다가 같은 버스에 탄 일행 외에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공원을 전세낸 것 같다.
한적하니 좋은 걸.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변방의 길 휘어진 저쪽 물끄러미 바라보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텅 빈 방처럼
후드득 묻어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에
울컥 눈물나는 가을
덥수룩한 웃음을 지닌 산도적 같은 사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혹시 서 있다가 아름답도록 아픈 사람을 만나면 불러 주십시오.
권대웅의 < 맨드라미에 부침 > 전문
언덕배기를 넘어가니 특이한 이름을 가진 화장실이 보인다.
이 화장실도 붉은옷을 입었는데 이름이 ‘놀래라 화장실’이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니 친구 왈, 혹시 뒤쪽 투명창으로 바다가 바로 보이는 것 아닐까 추측을 한다.
그래서 무심코 들어갔다가 깜짝 놀랄 수 있다고.
그러면 性的인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데...
공원에서 한참 놀다가 예배당 첨탑이 보이는 마을길로 접어든다.
탐스러운 해바라기가 비를 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 얼굴보다도 큰, 노란 해바라기꽃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넉넉해진다.
해바라기는 영어로 '썬플라워'이다.
'썬플라워'라는 제목을 가진 이탈리아 영화가 있었지.
소피아 로렌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였는데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남녀가 헤어져야 하는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
그 영화에서 보았던, 끝없이 펼쳐지던 해바라기밭이 강렬하게 기억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바라기를 관상용으로 많이 심지만 러시아에서는 식용유로 사용하기 위해 많이 심는다고 한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해바라기유 생산이 많은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해바라기유 가격이 급등해 자영업자들이 비명을 지른다는 뉴스를 접했다.
세상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전쟁 아닐까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들으며 한 생각이다.
해바라기 꽃밭 위로는 또 코스모스밭이 펼쳐지네.
요즘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꽃을 심어 축제를 하지만 나는 구세대여서인지 아직도 가을 하면 코스모스가 먼저 떠오른다.
코스모스를 보면 아련한 추억에 젖어든다고나 할까.
천천히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길을 따라 오른다.
병풍교회를 지나 아침을 먹을 식당으로 이동한다.
가는 길 담장에도 맨드라미가 그려져 있다.
식당 이름은 '맨드라미 하우스'
아침 식사로 뜨끈한 국물 음식이 나온다.
동태에 꽃게가 들어가 있고, 국물맛을 위해 작은 새우도 넣었다.
당연히 맛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
아침부터 움직이기도 한데다 몸이 약간 썰렁해 밥과 찌개를 덜어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간다.
해초와 도라지나물도 맛깔스러워 더 달라고 해서 깔끔하게 먹었다.
우리보다 좀 나이가 있어 보이는 커플과 마주 앉았는데 그분들은 자주 패키지 여행을 하시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밀양을 다녀왔다고 하신다.
맛집 여행을 주로 하는 여행사도 있어 가끔 따라간다고 하신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렇게 다닐 수 있을 때가 좋을 때지.
친구가 엊저녁에 무슨 음식을 드셨느냐고 하니까 호텔 근처에서 하모를 먹었다고 하신다.
'하모'는 갯장어의 일본말인데 여름에만 나는 바다장어로 많이 잡히지 않는지 가격이 꽤 비싸다.
음식점에 '싯가'라고 씌어 있었지.
비싼 음식 드셨다고 하니 유효기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두 분이 올해 68세로 동갑이라고 하시면서.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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