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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오늘의 시 - 발을 씻으며

by 솔뫼들 2020.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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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을 씻으며

                           황규관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던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에 길을, 씻자